사도행전 15:1-4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인간의 편견이 깨어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이제 먼 이방까지 전해져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교회 안에는 잠재된 갈등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이었다가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이 자신들과 달리 유대교를 거치지 않고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들을 판단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아는 대로 고넬료 사건으로 인해 어느 정도 답이 내려진 것 같았지만 오랜 기간 그 문제는 덮여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본문 1절에 나오는 대로 어느 순간 예루살렘 주변 유대지방에서 온 신자들이 먼 이방의 안디옥 교회로 들어오는 일이 있었고, 그들이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개입하셔서 율법과 무관한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리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 문제에 대해 수긍하는 듯 했지만 여전히 암묵적으로는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를 안디옥 교회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와 교회 안에서 그런 내용을 가르친 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에 대표로 갔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통해 모세의 율법, 즉 할례나 어떤 수단과 조건이 구원에 필요하지 않고 오직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의 은혜를 받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재확인했습니다. 그 회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헛된 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편지로 써서 이방인 형제 교회들에 보냈습니다.
11절을 보면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으로 구원받고 이방인들만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자기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믿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지켜온 율법이 구원에 보탬을 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할례라는 그 과거의 흔적이 자기들의 몸에 남아있어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구나”를 일깨우는 가시적인 증표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알게 되고, 거듭났을 때의 감격과 확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지만 눈에 보이는 형식과 흔적과 행위는 사람의 노력에 의해 계속 재현됩니다. 눈에 안 보이는 믿음 보다는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것이 내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구나 하는 안심을 쉽게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율법주의 같은 것이 우리 시대의 교회 안에도 뿌리 박혀 있습니다. 인위적인 확신을 향상시키기 위한 위선적 기도 방법들, 헌금 항목의 세분화, 행사 자체와 헌금 수익을 위한 교회절기준수, 과시적인 구제와 선교 등 셀 수 없는 헛된 공로주의가 교회 안에 만연합니다. 그런 것을 안 지키면 성도들은 불안하게 되고, 지키고 협조하면 신앙이 좋은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오래한 목사나, 교회 생활을 오래한 장로들은 그런 형식들이 있어야 교인들이 헌신을 잘 하고, 교회도 성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 받았어도 이기적이고, 게으르기 쉽기 때문에 이런 저런 항목들로 역동적인 신앙과 삶을 유지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계적일 때,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 공로주의적인 만족감을 이미 주고 있을 때 율법주의에 빠지게 만드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읽기, 기도, 신앙서적 읽기, 성경공부, 각종 훈련, 헌금, 여러 가지 다양한 예배 횟수, 봉사, 행사, 여러 헌신 등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한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하게 만들고 그분께 순종하는 일이 되도록 조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사람의 구원을 앞당기거나 유지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그런 형식과 방법들은 거듭난 자의 자발성에 의해 추구되어야 합니다. 거듭난 성도가 주님을 더욱 알기 위해, 오직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소망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있는 것들을 주님을 섬기기 위해 그런 방법들이 취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십계명을 지킨다고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원을 얻은 성도가 자기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 어떻게든 응답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동기 속에서 십계명을 지키려고 할 때 십계명을 주신 목적이 제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열 가지 계명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하지만 여전히 죄가 많은 자신을 발견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우리에게는 형식이 분명 필요하지만 구원의 은혜가 신자의 내면에서 선행될 때에 다른 유용한 형식이 공로주의를 만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는 일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 받은 유대인들은 자기 몸의 그 흔적을 가지고 육적 생명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할례의 의미를 늘 상기하면서 진정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면 됐고, 이방인들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보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 이외에 다른 짐을 이방인들에게 지우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회의는 그 결론만 내지 않고, 이방인 성도들이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기준들을 정해주었습니다. 이 기준들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구별됨을 위해 최소한 지켜야 하는 기준들을 마련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되 방종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구별된 삶, 거룩한 삶, 헌신된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당연한 의무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자발적으로 다양한 형식으로 성도다운 삶을 추구하도록 한 것입니다.
본문은 단지 회의 결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교회라고 불릴만한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적 미성숙, 그로 인한 혼란을 말합니다. 또한 36절부터는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퉈 갈라서는 것도 말합니다. 누가가 그런 것들을 왜 기록했겠습니까? 그런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면, 끊임없이 바로잡아주시지 않으면 바른 신앙을 소유하고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적 열심을 낼수록 또 다른 극단에 치우칠 위험이 항상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신앙적 유익을 추구하든지 그것이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항상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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