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자유를 복음 전할 기회로 바꿈 (행 16:11-40)

따뜻한 진리 2016. 12. 11. 23:04

사도행전 16:11-40                                                           김영제 목사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 지역에서 진행했지만 하나님께서 전도 할 기회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바울을 유럽으로 데리고 가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지금의 그리스 지역인 마게도냐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환상을 보았고, 드디어 마게도냐의 도시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빌립보에서 자주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라는 여자를 전도했더니 그 집의 사람들까지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바울이 귀신들린 여자를 자유롭게 만든 일이 있었는데, 그 여자를 이용해서 돈을 벌던 자들이 불만을 가지고 고발해서 바울 일행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감옥에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12장에서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도망치지 않고,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자책하며 자결하려던 것을 막습니다. 그 간수가 바울 일행을 집으로 초대하여 온 가족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다음 날 그 지역 상관들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인 것을 알고 풀어주려고 하지만 바울은 안 나가겠다고 버티면서 오히려 관리들을 난처하게 만듭니다. 그 지역 사람들과 관리들은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법과 질서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바울 일행을 고발하고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지만 사실은 죄가 없었고, 오히려 자신들이 로마 시민권자를 건드렸기 때문에 그것이 로마의 권위에 거스르는 것이 되어 두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관리들의 간청으로 바울은 그곳을 떠납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양했을 때 지진이 나고 결박이 풀어진 사건 때문에 기도와 찬양에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나가려고 찬양과 기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정작 기회가 왔을 때 감옥에서 안 나갔기 때문입니다.

 

    바울 일행은 2차 전도여행을 시작했지만 중간에 결실을 보지 못하다가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의 빌립보에 왔습니다. 거기서 루디아의 가정이 믿게 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다시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 같았는데 바울 일행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갇힌 그들의 걱정거리는 자신들이 언제 풀려날 것인가가 아니라 복음 전할 기회를 다시 얻는 것, 전도해야 할 영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매 맞고 감옥에 갇힌 후 기도하고 찬양했다는 것은 그 상황에 절망할 수도 있지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든 신뢰하고,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계속 복음 전할 기회를 주시길 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와 찬양을 했기 때문에 도망칠 기회가 왔을 때 안 나가고 오히려 자결 하려던 간수를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할 자에 대한 관심이 그런 상황에서 표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간수는 귀신 들려 점을 치는 여자에 의해 바울과 실라의 정체가 공개적으로 알려질 때, 또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잠깐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탈출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도망치지 않은 것과 자기 목숨을 살려준 것에 대한 감동한 간수는 바울과 실라에 대한 전적인 신뢰,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에 대한 열린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고, 그들을 선생이라고 불렀고, 집으로 데려가서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구원의 길에 대해 물은 것입니다. 바울은 기회가 온 그 때 주 예수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했고, 믿게 된 그의 가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게 될 줄, 그렇게 영혼들이 구원을 얻게 될 줄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이 예측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 여정을 마게도냐로 변경시키신 하나님은 바울이 매 맞고 감옥에 갇힌 고난을 통해서 영혼을 구원할 계기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일이 그렇게 풀릴지 예상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렇게 사람이 생각지 못할 방법으로 일하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잡혀 갈 때에 애초에 자기가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힐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중에 밝혀졌을 때 상관들에게 직접 와서 자신들을 데리고 나가라고 한 것도 바울이 자신의 신분과 권위를 인정받고자 허세를 부린 것이 아니라 상관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있을까 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귀신들림과 종노릇하는 여자와 책임감 때문에 목숨을 끊을 뻔 한 간수를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제한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가 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8-12절을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생명과 자유를 줄수록 바울은 자유를 빼앗기고 묶이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고난을 자처하면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의 최소한의 자유와 인권마저도 유린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알고 보니 내가 가진 자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착취 당하는 노예로 살아왔음을 깨닫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믿는 자로서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를 통해 다른 영혼들이 구원받을 기회로 쓰임 받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수는 그런 바울에게 충격을 받고 엎드린 것입니다. 바울에게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냐고 물은 것입니다. 자기 이익, 자기 안전, 자기 명예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 줄 수 있는 충격이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신 예수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신 예수님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