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1-5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가 헤롯 아그립바에게 죽임을 당하고,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다가 천사를 따라 나왔지만 다른 곳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마침 사울이 안디옥 교회가 보낸 부조를 전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베드로와 가까웠던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부터 사도행전은 사울을 통해 더 넓은 지역의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그래서 9절에서는 사울이라는 히브리 이름이 그리스 이름인 바울로 바뀝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그들이 구브로 섬 살라미라는 곳의 유대인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그 섬의 반대쪽 끝인 바보라는 지역에 갑니다. 거기서 이방인 총독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에게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려고 할 때 거짓 선지자 바 예수라는 사람이 방해를 합니다. 바울이 그 거짓 선지자에게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하자 정말 맹인이 되었고, 그 일을 본 총독 서기오 바울은 놀라서 바울의 가르침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배를 타고 버가에 갔다가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설교를 합니다. 16절에서 41절까지가 그 내용입니다. 이 바울의 설교는 3장에 있는 베드로의 설교와 7장에 있는 스데반의 설교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이 설교에는 출애굽과 광야생활, 사울과 다윗, 세례요한의 사역,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약속된 분임을 알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구약의 많은 예언들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35절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이 부활의 이적은 역사상 어느 누구에게도 일어난 적이 없고, 일어날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 구원의 사실을 모두가 다 믿지는 않고, 멸시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은 멸망할 것이라고 바울이 하박국의 말씀을 인용해서 경고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말씀을 전했을 때, 42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동일한 말씀을 전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고, 실제로 그 다음 안식일에 온 시민이 거의 다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유대인들은 시기가 가득해서 그 도시의 귀부인들, 유력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고 쫓아냈습니다. 그렇게 어떤 이들은 말씀을 다시 듣고자 했고, 어떤 이들은 그 말씀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바울 일행을 쫓아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나 집사들이 복음을 전했던 방법은 바로 성경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드러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의 이적과 신비로운 체험이 많이 등장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인한 방언,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된 일 등 여러 이적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적 체험을 사용하십니다. 이적으로 사람의 감각적 경험을 통해 마음이 열리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많은 이적들을 이스라엘 중에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고 목격한 군중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음 없이 이적만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적 자체는 구원 얻는 믿음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적을 경험하는 일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거기에는 반드시 복음 전하는 일, 설교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런 말씀 전파에 의해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스데반의 설교, 빌립의 말씀 전파, 그리고 바울의 설교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바르고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을 설명하시면서 자신을 증명하셨듯이, 사도들도 제자들도 그렇게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그렇게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적인 메시지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냥 마음에 와 닿는 단어, 구절에 집중해서 깊은 자기 생각에 빠집니다. 그것을 묵상이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현재 처지, 상황에 따라 구절을 취사선택하고, 자신의 감정대로 본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도 개인 뿐 아니라 목사들도 설교를 그런 식으로 합니다. 성경 본문의 문맥과 상관없이 소위 성도들이 은혜 받을만한 성경 구절의 어떤 단어를 끄집어내서 청중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위로를 주고, 장래에 대해 인간적인 소망을 갖게 해주는 말들을 갖다가 붙이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다루니까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성경을 말도 안 되게 암호 맞추기 식으로 해석하고, 그 결과로 자기네 교주가 재림 예수라고 설명해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바울은 설교를 듣는 회중들에게 ‘너희가 안식일마다 외우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익숙하게 외우고는 있지만, 다루고는 있지만 참된 의미를 이해하는 일에는 무능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말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합니까? 성경을 읽고 이해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절을 보면 사십 년 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악행을 참으신 것, 21절에서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인도하신 왕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 왕을 구했다는 것, 이어서 하나님이 사울을 주셨다가 폐하신 것, 24절에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 세례요한이 회개를 요청한 것을 바울이 말한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인 이스라엘을 오래 참으시면서 그것을 깨닫도록 이스라엘의 역사를 인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것을 깨달았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한 자야말로 하나님께서 구속주를 보내셔야 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고, 마침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도 알아보게 되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안목이 있을 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38절이 말하는 대로 우리는 가망 없는 죄사함이 필요한 자들이고, 구약이 예고한 부활하신 ‘이 사람’ 예수님이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며, 39절이 말하는 대로 그런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전달하면, 복음을 전하면 동의하는 자와 싫어하는 자가 분명하게 갈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 말한 거룩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과 구원이 필요한 죄인인 나를 인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씀을 다시 듣고 싶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어떤 사람들은 듣기 싫어서 사도들을 쫓아냈습니다. 교회는 이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복음을 들으면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설교에서 가졌던 그 관점,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관을 가진 자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성경 속에서 복음의 풍성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불거진 할례 문제 (행 15:1-41) (0) | 2016.11.27 |
---|---|
죽을 뻔한 일과 신이 될 뻔한 일 (행 14:1-28) (0) | 2016.11.20 |
세 명의 사도들 (행 12:1-25) (0) | 2016.11.06 |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 (행 11:19-30) (0) | 2016.10.30 |
고넬료의 회심과 교회의 당황 (행 9:32-11:18) (0) | 2016.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