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1-28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된 사도바울과 바나바는 구브로 섬에 이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이고니온이라는 곳으로 옮겨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성도들을 선동해서 사도들에게 대한 반감을 품게 했습니다. 사도들이 처음에는 굴하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하자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주셔서 사도들의 복음 전도가 하나님의 일임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선동에 넘어간 사람들의 핍박이 거세져서 두 사도를 돌로 치려하자 사도들은 그곳을 떠나 루스드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을 바울이 걷게 합니다. 그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 놀라서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바울은 헤르메스(대변자)라고 말하며 살아있는 그들을 신이라고 여기고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두 사도는 자신들의 옷을 찢으면서 ‘우리들은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고, 우리들이 복음 전하는 것은 당신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들은 겨우 사람들을 진정시켜서 자신들에게 제사하는 일을 막았습니다.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지나온 곳이지 않습니까? 그곳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쫓아낸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죽이겠다고 먼 곳까지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죽일 때처럼 바울에게 돌을 던졌고, 바울이 죽은 것처럼 보이자 성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바울을 소생시키셨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더베라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한 후 자기가 지나왔던 지역을 다시 방문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주님께 맡기고 처음 출발한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1차 전도여행입니다.
본문 1절과 21절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사도가 전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 중간에는 다른 부류들이 등장했습니다. 한 부류는 복음 전하는 과정에서 항상 있었던 반대자들, 핍박자들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악한 열정이 사도들과 초대교회를 핍박하는 일에도 동일하게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또 다른 부류는 사도들을 노골적으로 방해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을 환영했던 사람들입니다. 기적을 일으킨 바울을 자신들의 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의 옷을 찢어가면서 까지 그들의 접대를 거절했는데,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로서 당연한 행동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처럼 여김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세상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이 신처럼 여김을 받고,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군림하게 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이나 재벌기업 회장이나 사이비 이단 교주들뿐 아니라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교회의 목사들도 자기 신성화의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대단한 자리에 있어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만화나 영화를 보면 등장인물이 원주민이나 원시인을 만났는데, 우연한 사건 때문에 신처럼 대접을 받는 장면들을 우리는 본 적이 있을 텐데, 그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고, 나를 어느 정도 두려워하면서 높이는 것을 인간은 원합니다. 그러면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다른 사람들의 찬사와 지지를 받는 것을 원하지 무시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회만 주어지면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떠받들어주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바나바에게 있어서 신처럼 군림할 수 있는 기회나 돌에 맞아 죽을 뻔 한 핍박은 모두 복음사역을 감당하는데 고난을 주는 방해거리였습니다. 사도들이 그런 유혹에 굴하거나 핍박에도 좌절하지 않은 것은 동일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유혹과 목숨을 위협하는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기를 바라며, 그로 인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높아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자기 위치나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참 신이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에 자기 존재의 영광이 달려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것보다 구원의 은혜가 가장 귀한 것이기에 사도들은 그것을 전하려고 했던 것이고, 자기 죄와 욕망으로 그 은혜를 가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누군가 예수 믿는 인생을 산다고 할 때에 그로 인한 노골적인 핍박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고 전하는 일에 장애물이 되는 것은 신자 자신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를 믿어서 성공하고 복 받는 것을 기대하고 있고 목사는 큰 교회를 이뤄서 자기 왕국으로 만드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도구 삼아 자기 욕망을 이루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도 구원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신자와 불신자들의 마음도 닫게 하여 전도를 막는, 복음의 은혜를 가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안전과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성공과 우리의 가치실현은 이 세상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고, 그것은 구원을 통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보장된 것이니 우리는 두려움 없이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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