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볼로의 한계와 성령의 사역 (행 18:1-19:7)

따뜻한 진리 2016. 12. 25. 23:09

사도행전 18:1-19: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바울은 철학과 우상이 함께 번성했던 도시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갔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납니다. 이 부부는 천막 만드는 사람들인데, 바울 역시 그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역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부부와 바울의 동역은 단지 같은 분야의 기술을 가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도 함께 사역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에베소에 가서 머물다가 바울이 안디옥으로 돌아가고 없을 때, 그곳 에베소에 아볼로라는 사람이 오게 됩니다.

 

     아볼로는 성경에 대해 박식한 유대인 석학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에 대해 자세히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회당에서 아볼로의 가르침을 듣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볼로가 성경도 잘 알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고 열정적으로 전했지만 복음에 대해 이해가 불완전했음을 그 부부는 알게 된 것입니다. 25절에서는 그런 아볼로의 상태를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는 아볼로를 자신들의 거처로 초대해서 복음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아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가야로 갔습니다. 그 사이에 바울이 그곳 에베소로 다시 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의 아볼로의 상태와 비슷하게, 요한의 세례까지만 아는 자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자 성령께서 임하셔서 신비로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행 2:38; 10:44-45 물 세례와 성령의 믿게 하시는 세례 사역의 순서가 달라질 수 있음)

 

     여기서 에베소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의 의미는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교회에서는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물세례를 받고, 이후에 성령세례를 받아서 체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두 가지 단계를 다 경험해야 신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도 드러나지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 같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노력으로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결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고, 성령의 세례입니다. 방언이나 예언은 그것을 믿게 하시려는 가시적인 증거일 뿐이지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시적인 증거 없이도 우리가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더욱 놀랍게 역사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세례요한의 세례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가 그 훌륭한 아볼로를 조심스럽게 가르쳐야만 했던 이유, 또 바울이 에베소에 돌아와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만큼 세례요한의 이해는 불완전한 것이었는가에 대해 우리는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당시 세례요한이 먼저 사역을 시작했고 영향력을 드러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 즉 종교적 형식을 지키는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이해했지만 그와 달리 세례요한은 인간이 죄를 억제하고, 착하게 산다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죄인됨을 해결 받아야 구원 얻는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까지 나갔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씻는 회개만이 곧 임하게 될 심판을 피하는 방법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라는 종교적 형식의 위선을 깨닫고 양심의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의 그런 가르침은 마치 복음이 각 곳으로 전해진 것처럼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앞서서 여러 지역에 전파되었고 그 가르침을 믿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볼로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의 유대교인들도 있었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발전한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믿었던 유대인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세례요한의 가르침에는 예수님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통찰했고, 그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그런 모범이 될 것도 알았지만, 예수님 자체가 죄의 해결자가 되신다는 것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먼저 죽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모르고 죽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세례요한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율법과 종교의 허망함을 깨닫고, 자신의 근본적인 죄인 됨을 알고, 어떤 노력과 깨달음을 가져도 심판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바울의 아테네 사역에서도 살핀대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고, 인간의 죄성을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자기 죄를 뼈저리게 후회할 수 있고, 그렇게 참회하면서 선행이나 윤리적인 삶으로 나의 죄를 만회하는 것 같은 보람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깊고 자세히 배울 수도 있고, 교리와 신학을 많이 배우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경이로움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가 그런 깨달음으로 우리의 이 세상을 이롭게 하고, 각양 좋은 칭찬을 받는다 해도, 그런 것이 우리에게 넘치도록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왜 죽으셨고 부활하셨는지를 모른다면, 그분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분으로 인한 만족과 위로가 기쁨을 주지 못한다면, 그분으로 인한 변화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것은 이론이나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죄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방법입니다. 그 십자가는 어떤 것도 도와줄 수 없는 우리의 멸망의 원인을 해결해주는 능력이고, 우리를 진정으로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아볼로에게는 그 복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알게 되는 것, 깨닫게 되는 것, 믿게 되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의 역사만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부께서 아들을 보내셨고, 성자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성취하신 것처럼, 그 구원의 은혜가 각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 역시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인 성령의 사역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