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7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본문에는 바울 일행이 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를 말합니다. 그 지역은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인데 먼저 앞의 두 지역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있었던 일은 거의 유사합니다. 아덴에서의 복음 전도는 좀 특별했습니다.
먼저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성취임을 설명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모르는 헬라인들은 복음을 믿은 반면에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공격했습니다. 다음으로 베뢰아에서도 적지 않은 헬라 귀부인과 남자들이 복음을 믿었지만 유대인들은 역시 소동을 일으켜 바울 일행이 떠나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11절을 보면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중에는 이 구절을 암송 구절로 외워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또 이 구절은 성경 묵상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종종 사용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매우 사랑했으니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는 의도로 암송구절로 선택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11절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앞의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베뢰아 사람들이 부드러운 마음 상태여서 바울이 전한 내용을 잘 귀담아 듣고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정도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일에 있어서 모범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바울이 방문한 지역은 아덴, 현대어로 그리스의 아테네입니다. 아테네는 어떤 곳입니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같은 철학자들이 활동했던 도시입니다. 아테네는 우리가 아는 대로, 그리고 21절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당시 최신의 학문을 교류했던 장소입니다. 아테네에 모인 사람들은 최고의 지혜를 얻고자 고민하고, 토론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 바울은 격분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 도시에 우상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경험과 이성을 가지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일에 몰두하는 최첨단 학문의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다양한 우상들이 있었고, 심지어 23절에서 말하는 대로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 새긴 단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선미를 추구하기 위해 오늘날의 우리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수준 높은 철학적 사유들을 논하고 정리했지만 결국 인간이 만든 미개한 종교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천재적인 생각을 해서 우주와 이 세상과 인생에 대해 설명을 해도 인간은 자기 곁에 있는 불안과 공허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종교를 버리지 못합니다. 헛된 우상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합니다. 대학 캠퍼스에서는 돼지머리를 둔 고사상 앞에 절을 하면서 행사를 하는 일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많이 배웠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점과 무당을 의존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 이사를 할 때 손 없는 날을 챙깁니다. 인간은 모든 상황과 환경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측할 수 없는 불안의 요소들을 피해가기 위해서 결국 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아테네의 똑똑한 자들이 어리석은 수준의 우상에게 붙잡혀 있는 것을 보고 답답해하면서 그들에게 진정한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24절부터 31절까지가 그 내용입니다. 먼저 24절부터 29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 의존하고 있는가, 어떤 존재에게 자기 미래를 맡기느냐는 자기 가치를 어떻게 여기는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고귀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자연물, 거짓 영적 존재들을 숭배하는 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추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의 소생,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이고 하나님께 의존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공간의 경계와 시간의 범위를 설정하시고 사람이 자기를 찾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그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가치, 격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시작하신 그분의 존재와 사역이 우리의 가치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작과 더불어 30-31절에서 바울은 피할 수 없는 심판도 말했습니다. 세상 역사는 끝이 있으며,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끝은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우리를 판단하시고 영원한 최종 선고를 내리실 하나님의 결정을 말합니다. 그분이 나를 판단하시는 것에 대해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될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바울은 ‘회개’라는 말로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주신 것을 말했습니다. 이렇게 창조와 종말과 심판, 그리고 구원에 대하여 바울이 말했는데, 그 내용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 근거를 무엇으로 제시했습니까? 바로 3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그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복음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되시고, 동시에 멸망에서 구원하실 해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복음에는 아테네 사람들이 결코 자신들의 생각, 철학으로 찾아 낼 수 없는 이 세상의 시작과 끝과 인간의 목적과 상태와 결과가 담겨져 있습니다.
다시 본문 처음으로 돌아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끈질기게 바울을 핍박한 유대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이미 바울이 말한 내용을 옛적부터 다 알고 믿고 있었습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빼고 말입니다. 그런데 32절을 보면 아테네 사람들이 믿지 못하겠다고 한 것 역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라고 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처럼 구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리스 로마인들처럼 아무리 뛰어난 철학적, 과학적 성취를 가지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는 영적 반응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에게 죄를 물으시는 하나님의 주권,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 인간은 그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와 종말은 믿습니다. 창조는 나의 가치를 높여주니까 믿을 만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 종말도 믿어지는데 십자가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 정도까지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라는 이상하고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자기가 구원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인간은 자존심을 굽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창조를 믿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종말과 심판과 영원을 믿는 자는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죄도 보게 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겸손하게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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