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 이름의 능력을 힘입으려면 (행 19:8-41)

따뜻한 진리 2017. 1. 1. 23:27

사도행전 19:8-4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바울이 에베소의 회당에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칠 때 일부 유대인들이 비방을 하자 두란노 서원으로 옮겨서 2년 간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로 인해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을 통해 이적을 베푸셨는데 심지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치료되고 귀신이 나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서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그것을 보고 바울처럼 예수의 이름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 일을 모방했고, 그 중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도 그렇게 하다가 도리어 악귀한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라는 말을 듣고 괴롭힘을 당하다가 달아났습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해들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2:19에서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말한 것처럼 오히려 귀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귀신들은 누군가가 예수님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정말 관계가 있어서 예수께서 능력을 베푸실 것을 귀신들이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이름을 언급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치료된다는 말을 많이 듣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를 반복하면서 다그치듯 기도하고, 선포하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믿고, 의지할 때 그 이름의 주인이신, 우리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도우시는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 아빠를 부를 때 인격적인 사랑과 책임감에 의해 그 부모가 달려오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우리의 음성을 듣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불순종해도 부모는 달려오는 것처럼 때론 우리의 믿음과 삶이 부족해도 주께서는 도우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우리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시작되었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이 없이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무지한 것이고 주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이어서 더메드리오라는 아데미 여신상의 모형을 만드는 자가 같은 직종의 직공들과 영업하는 자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그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우상 장사가 점점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울의 동역자들을 잡고 소동을 일으켰지만 고위직 관리자가 그들을 달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처리하자고 설득하자 해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결국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이익입니다. 26절을 보면 우상을 만드는 직공이 동료들을 선동할 때 바울이 한 말,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용했습니다. 바울의 말은 진리입니다. 그 우상 만드는 직공들은 스스로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자신들이 신이라고 여기는 아데미를 조각품으로 만들어 일개 상품이 되게 한 것입니다. 말로는 신이지만 그것으로 자신들은 돈을 벌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헛된 안심을 주는 도구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아데미를 스스로 무시했으면서도 우습게도 아데미의 영광을 회복하겠다고 아데미의 이름을 두 시간씩 외치며, 바울의 사역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데미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보였습니다. 단지 돈이 그들의 신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거짓 종교들, 사이비 종교들이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이 없는 교회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들의 이익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다른 거짓 종교에 의해 핍박당할 뿐 아니라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교회에 의해서도 핍박을 당합니다. 종교성을 위해 복음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인간의 탐욕에 가려짐으로 핍박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마저 우상으로 만들어서 장사를 하는 것이 됩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이 예수의 이름을 이용한 것처럼, 우상 판매자들은 아데미의 이름을 이용했습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처럼 그 이름을 헛되게 부르지 않고,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의 함께 하심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이 주시는 능력과 위로를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7절에서 19절을 보면 스게와의 아들들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자신들의 마술 비법이 담긴 책들을 불태웠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행한 일을 스스로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의 판단, 그분의 기준으로 자기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주님과 관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판단을 무시하지 않고, 그분에게 다스림을 받고자 하는 자에게 주님은 자기 이름의 영광을 나타내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때 친히 자신을 드러내시고,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나아가 성도는 그분의 이름 자체로 인해 인내하며 소망을 가질 것입니다. 세상의 원수 마귀를 결국 멸하시고, 모든 죄를 청산하시고, 죽음과 고통을 걷어내실 그분의 이름만이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우상들의 이름처럼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고, 자기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명예를 위해 약속을 지키시는 분, 살아계신 분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분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