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난을 선택한 바울 (행 21:1-16)

따뜻한 진리 2017. 1. 15. 23:19

사도행전 21:1-1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한 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두로라는 곳에 들렸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바울이 두로를 떠나 가이사랴에 갔을 때는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하루는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와서 바울이 유대인들에 의해 붙잡혀서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바울과 여정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가는 곳 마다 바울에게 닥칠 일에 대해 계속 듣게 되자 슬피 울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주님을 위해 그런 고난당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죽음도 각오했음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바울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특이한 점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앞으로 겪게 될 일을 듣게 된 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성령께서 두 번씩이나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근거로 계획을 수정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스른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 앞날에 대해 알려주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겪게 될 앞으로의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을 함께 들은 동역자들의 해석과 바울의 해석은 서로 달랐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고난 당할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꾸 알리신 것을 자신에게 피할 기회로 주신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 뜻이니 담대하게 계속 전진하라고 응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9: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실 때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그에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이 고난으로 채워질 것을 알고 있었고, 받아들였고, 고난을 향해서 갔습니다.

 

    바울은 각 지역을 방문하면서 고난 당할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는 일부러 자기 힘으로 고난을 피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에게서 기적적으로 피하게 하셨고(14:6), 또 거의 죽은 것 같은 상태에서도 기적적으로 회생시키셨습니다(14:19). 또 감옥에서도 나오게 하셨고(16), 여러 반대와 소동과 고소 속에서도 휘말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주님을 신뢰하는 것을 경험하고 배웠습니다. 감당해야 할 고난이라면 알면서도 받아들였고, 그것이 피할 수 있는 고난이라면 자기가 달아나지 않아도 주께서 피할 길을 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바울은 언젠가는 피할 길이 끝나고, 자신의 생애가 끝날 것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항상 움직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각오를 본문 13절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14:22, 20:24-25). 바울은 자신의 고난에 대해 성령님께서 자꾸 말씀하신 것을 피할 기회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 고난이 주님이 원하시는 길임을 확신했습니다. ‘이 고난은 내가 피하지 않고 겪어야 할 고난이구나, 이전부터 내게 주신 마음이 맞구나’ 하고 확인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이미 분명하게 알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바울이 고난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게 됩니다. 세상은 고난을 악으로 이해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확대시키는 것이 인간의 관심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피해갈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상한 꿈을 꾸면 조심하려고 하고, 오늘의 운세나 점 같은 것을 의지해서 어려움을 피하려고 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어떤 예언이나, 기도응답, 꿈 같은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안전한 길로 보호하시려는 뜻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을 말렸던 지체들 처럼 성령께서 알려주신 것이 그런 차원이 아니겠느냐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고난을 피하기 위해 주께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을 거두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고난을 제거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간절하게 구해도 하나님께서 피할 수 없는 고난들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어떤 고난은 평생을 지고 가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구원을 위해 감수하고 살아야 하는 고난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바울도 자신의 육체적 고난 때문에 여러 번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의 어떤 고난은 생각만 해도 벌벌 떨릴 정도로 두렵고 끔찍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닥칠 가장 크고 무서운 고통은 우리 주님께서 다 지셨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위로는 지금의 고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 고난을 주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