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2-26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잡힙니다. 그 와중에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변론을 합니다. 자신이 유대인과 유대교를 모욕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자였으나 예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심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그런 복음적 자기변호를 했지만 유대인들은 더욱 분노하며 죽이려고 했습니다.
군중이 분노하면서 펄펄 뛰자 로마군 지휘관 천부장은 바울이 뭔가 대단한 잘못을 한 줄로 생각해서 그를 가죽 줄로 결박하고 채찍질하려 했고,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면서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면 정당하게 밝혀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이 바울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꾸미자 그 사실을 바울의 조카가 알고 그 천부장에게 보고합니다.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을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보냈고, 바울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변호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을 2년 가까이 감옥에 가둬 놓았고 얼마 후 다른 총독이 후임으로 오게 됩니다. 그 신임 총독은 베스도인데, 이스라엘 왕 헤롯 아그립바 2세가 신임 총독 베스도에게 인사하러 왔다가 바울을 만났고, 이번에도 바울은 그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언했습니다.
바울이 잡혀서 겪은 일련의 과정들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잡히신 후 다음 날 새벽에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가서 심문을 받으셨고, 다음으로 산헤드린 공의회에 가셔서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다음으로 빌라도에게서 1차 심문을 받으시고, 이어서 헤롯왕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다시 빌라도에게 가셔서 최종 십자가형을 판결 받게 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주님께서 십자가로 가신 과정을 생각했을 것이고, 주께서 예고하신대로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주님을 의지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바울을 붙잡은 관리들이 보여주는 일관된 태도들이 있습니다. 23장 27절을 보면 로마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바울을 결박하고, 채찍질을 명령한 후에 뒤 늦게 바울이 말해서 로마시민권자임을 알게 되었는데(21:33; 22:24), 천부장은 마치 자신이 바울을 로마시민권자인지 알아보고 구해낸 것처럼 자기 업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24장 2절을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 데리고 온 변호사 더둘로는 총독 벨릭스에 대해 아첨하면서 바울을 거짓 고소했습니다. 24장 26절에서 총독 벨릭스는 바울에게 뇌물을 좀 받을까 기대를 했습니다. 25장 9절에서 신임 총독 베스도는 유대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자 바울을 심문하려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극도로 흥분해서 바울을 죽이려 했지만 관리들이 조사를 해봐도 바울의 잘못은 없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도덕적 윤리적 잘못이 없고, 유대교를 와해시키려는 행위를 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관리들은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중 총독 벨릭스는 2년 동안 바울을 옥에 가두고 가까이서 복음을 들었습니다(24:27).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이익이었습니다. 26장 24절을 보면 신임 총독 베스도는 바울에게 이런 말도 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베스도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자신에게 왜 필요한지 알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이 제정신이 아니어서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나 로마 관리들에게나 그들의 현실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움켜쥘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성전과 종교적 행위들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자신들의 자부심과 정체성이 그들이 지켜야 할 현실이었습니다. 로마 관리들에게는 자신들의 직책, 권력, 명예, 돈이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무엇이 현실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의 현실이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기회가 되는 대로 전한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 군중에게나 자기를 가둬 두고 있는 로마 관리들에게 변론한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그분을 대적했고, 자격도 없었지만 그분이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세상이 가리려고 하는 진실을 알려주시고, 믿게 하시고, 구원하시고, 사명을 주신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잡으려는 군중들 앞에서 그 내용을 말했고, 잡힌 후 여러 관리들의 앞에 섰을 때도 그 내용을 계속 말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일어난 현실이 다른 이들의 현실이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처럼 고난당하고 감옥에 갇히길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의 헛된 것에만 정신이 팔려 살지 않고, 가장 중요한 영원한 현실을 알게 되길 바란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진정한 실체인 하나님과 죄와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을 알고, 믿게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초청을 어리석은 것, 미친 것으로 평가하고 이 세상의 현실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난 현실, 바울이 살았던 현실을 보는 것을 거절합니다. 벨릭스나 베스도나 아그립바나 그런 반응을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고립된 고난 가운데서도 성실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복음을 듣고 회심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바울이 자신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실하게 전했지만 예수님은 바울의 사역을 통해 모든 이에게 자신을 드러내시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을 얻지만 어떤 이들은 바울 같은 사람에게 전도를 받아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나 바울의 사역을 통해 엄청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 같지만 그러나 세상의 눈에는 미약하고 힘없고 흩어져 있는 모임들에 불과했습니다. 세상에서 진정으로 예수를 알게 되고 믿는 자들은 늘 소수였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은 신비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코 다수가 가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수천 명이 회심하고, 사역자들의 활동으로 계속 예수 믿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복음이 확장되기 때문에 기독교가 믿을 만한 것이라고 사도행전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대세가 되고 있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큰 교회가 많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고, 기독교가 어떤 영향력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대중적인 것,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다수가 하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뭔가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많은 사람들이 반응하고 따라오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도 아니고, 본문에서처럼 전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려서 계속 그분에 의해 살아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은 그 고독 속에서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어 있고, 주님은 그런 자들을 통해서 비밀스럽게 자신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명기 서론 (신 1:1-5) (0) | 2017.02.05 |
---|---|
주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케 하는 복음 전파 (행 27-28장) (0) | 2017.01.29 |
고난을 선택한 바울 (행 21:1-16) (0) | 2017.01.15 |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는 이별 (행 20장) (0) | 2017.01.08 |
그 이름의 능력을 힘입으려면 (행 19:8-41) (0) | 2017.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