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7-1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산상수훈을 지금까지 살핀 대로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팔복의 상태를 소유하고 경험합니다. 또 살인, 간음, 헛된 맹세, 복수, 원수를 대하는 것에서 우리가 당한대로 또 상대방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수준으로 행한 것을 충분하다 생각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적극적인 사랑을 베풀어야 함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가식적인 종교행위가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으니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와 구제와 금식을 행하라고 말씀하셨고, 물질에 대한 집착과 염려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라고 하셨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력을 가지되 자기 자신을 먼저 분별하고, 그 분별력으로 형제를 비판하면서 우쭐하기보다 외부에 있는 진정한 위험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들을 우리가 제대로 들었다면 실제로 그것을 추구하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것이 진정 구원 얻은 자의 삶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흔히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구하면 받고, 찾으면 찾게 되고, 두드리면 열리니까 무조건 매달려서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 붙잡고 늘어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다 주시는 것처럼 이해하기 쉽습니다. 또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신다는 말은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림 그린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인간적인 희망을 품게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인내하면서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대로 반드시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무엇을 주실 지는 하나님께 달렸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신뢰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동일한 내용을 말하는 누가복음 11장에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에는 돈과 건강과 성공이 가장 좋은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솔직히 신자인 우리마져도 절실히 원하지 않을 수 있는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세상적 욕심과 기대를 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구원을 추구하는 것마저 자기집착과 자기사랑의 동기로 하기 쉽기 때문에 그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영이 개입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산상수훈 전반에서 지적하신 거짓된 종교심과 도덕심이 진정 자신의 문제인 줄 알고 팔복을 얻고 자, 원수를 사랑하고자, 땅이 아닌 하늘에 보화를 쌓고자, 위선적인 자기만족이 아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해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고자, 자기 안의 들보와 같은 죄를 해결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께 매달리라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삶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가능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에게 성령이 필요한 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진실하게 반응해서 거듭난 자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망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되어있고,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런 자를 실패 없이 자기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태도를 가지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는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 찾게 하시는 것, 열어주시는 문은 좁은 문과 같기 때문입니다. 13절과 14절이 말하는 대로 그런 문을 찾는 자는 적습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주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 거슬러 올라가 산상수훈의 주님 말씀을 듣고 진실하게 반응하는 자는 적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중간의 12절에는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의 요점인 율법과 선지자의 교훈이라고 요약하실 정도로 중요하게 말씀하신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입니다. 이는 계산적으로 상대에게 원하는 만큼 먼저 잘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7장 1절에서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의 의미가 상대에게 지적받지 않기 위해 상대를 지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닌 것처럼 12절의 대접하는 문제 역시 남에게 한 대로 내게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선을 베풀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사람들이 그 정도만 잘 해도 세상은 살기 좋아질 것이지만, 그런 정도의 수준은 세상 사람들도 웬만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그 정도를 요구하시려고 그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교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의 의미를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정도는 끝이 없습니다. 잘 해줄수록 더 원합니다. 헌신적인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것과 같은 사랑을 모든 인간은 원합니다. 그런 사랑을 우리가 원하듯이 우리도 남들을 대할 때도 한계를 두지 않고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산상수훈 앞부분에서 말씀하신대로 속옷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고, 원하는 것보다 더 해주라는 내용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를 율법과 선지자의 교훈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과의 관계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이 주는 교훈은 이웃 사랑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이웃사랑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인격적인 사랑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자는 자기에게 죄지은 남을 용서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하시길 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비판 받지 않기 위해 남을 함부로 비판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에게 잘해야 하나님이 나에게 잘 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조건 없이 나를 용서하신 것을 믿기 때문에 남에게도 은혜를 베풀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속 그렇게 대해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증명이 되는 것 그것이 율법이고 선지자들의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대로의 삶을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속으로 대답합니다. 그 대답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사랑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자는 산상수훈을 곤란하게 여길 것이고, 본문의 의미도 제멋대로 자기 욕망을 위해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상대하지 않는 기도를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그 불가능해 보이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나님께 매달릴 것입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외된 자들을 치료하신 주님 (마 8:1-17) (0) | 2017.12.24 |
---|---|
늘 찾는 이가 적을 좁은 문 (마 7:15-29) (0) | 2017.12.17 |
죄를 다루기 위한 분별력 (마 7:1-6) (0) | 2017.12.03 |
주를 의지하게 하는 매일의 염려 (마 6:19-34) (0) | 2017.11.26 |
누구에게 보이려 하는가? (마 6:1-18) (0) | 2017.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