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성전 정화 사건 (마 21:12-46)

따뜻한 진리 2018. 5. 6. 20:33

마태복음 21:12-4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루살렘 성으로 가신 예수님은 먼저 성전에 가셨습니다. 성전은 제사를 통해 기도하는 것, 즉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행위를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과 돈 바꿔주는 자들의 의자와 테이블을 뒤엎으시고 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제사를 위한 희생제물을 팔고 그 거래에 필요한 돈을 환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예배는 없고, 이익을 위한 경제활동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종교성을 이용한 이익 추구의 장소로 전락하는 일에는 종교지도자들의 악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그런 소란을 일으키시면서 예레미야 7장을 인용하시면서 성전의 본래 역할을 기도하는 것으로 언급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성전에서 예수님은 맹인과 다리 저는 자들을 고치셨고, 성전에 있던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신 일들과 아이들의 외침에 대해 화를 내면서 예수님께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알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옳았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잘못을 바로 잡아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12절부터 15절까지 일어난 일들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그 일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한 일, 아이들이 한 일이야 말로 성전에 일어나야 할 당연한 일이라는 뜻으로 16절에서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 가에서 잎만 무성하게 많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셨습니다. 그 일에 대해 제자들이 놀라며 묻자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이 있으면 무화과나무에게 일어난 일보다 더 큰 일도 일으킬 수 있고, 기도할 때 다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사건은 분명 열매 없는 이스라엘 종교의 심판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이스라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왜 제자들의 믿음과 기도로 연결하셨는지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족한 제 생각으로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인해 결국 성전이 파괴되지만,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더 큰 일, 즉 헛된 종교에 빠진 유대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해 그들 안의 거짓을 무너뜨리고 예수를 알게 하는 일을 감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저자 마태는 성도들이 같은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파하는 일을 위해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기도할 것을 권면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이어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또 와서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권세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물으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고 대답한다면 그 자신들이 세례요한은 믿으면서 왜 그가 가리킨 예수님은 믿지 않는지에 대해서 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세례요한이 자칭 선지자이거나 사람들이 만든 권세로 일한 것이라고 그들이 대답한다면 백성들도 알아보는 세례요한의 신적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백성들에게 비방을 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대답을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도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비유를 통해 대답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비유는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두 아들에게 요청을 했는데, 한 아들은 간다고 말해놓고는 안 갔고, 다른 아들은 싫다고 말했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또 다른 비유는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밭을 맡겨놓고 먼 외국에 가 있었는데, 열매를 수확할 때가 되자 주인이 그 소득을 얻으려고 종들을 보냈더니 그 포도원을 맡은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이고, 나중에는 주인이 보낸 아들도 죽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질문을 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돌아올 때에 그 악한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과 재물을 착복했습니다, 그런 잘못을 깨닫게 하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은 멸시해왔고 그 아들이신 예수님도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에 대한 적대 행위로 요약하셨고, 종교지도자들을 지적하신 동시에 자신의 죽음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비유 끝에 질문을 하시면서 심판이 정당하다는 공감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비유들이 자신들에 대해 이야기임을 알아듣고 화가 나서 예수님을 잡으려 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로마를 뒤엎는 일을 하지 않으시고 성전에서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생기도록 기적을 베푸시지 않고 말라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셔서 일으키신 일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위해 고의적으로 행하신 일이고, 이스라엘의 종교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행동이었습니다. 소외된 자들, 배우지 못한 자들, 죄인으로 낙인 찍힌 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32절에서 말하듯 종교지도자들은 끝내 뉘우쳐 깨닫지 못하고, 즉 회심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자신들의 머리 위로 돌이 떨어질 때까지 버티다가 망했습니다.

 

    이스라엘과 그 종교지도자들에게 구약시대와 같은 풍성한 은혜,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가 영원히 계속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멸망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인생 중에도 기회가 계속되지 않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을 나중으로 미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뒤엎어야 할 것들을 여전히 펼쳐놓은 채로 하나님을 조롱하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까? 대답만 하고 불순종하는 아들 같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 속에서 열매를 취하시려는 주님께 저항하면서 자신의 자존심과 권리와 쾌락을 추구하지는 않습니까? 선행을 할 때 하나님과 다른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닌 자기만족과 안심을 위해서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진정한 믿음을 가질 기회를 계속 얻기를 바라지만, 우리가 버텨도 하나님이 계속 우리를 구원하시고 참된 성도가 되도록 부르시기를 바라지만, 인생들을 살펴보면 그 기회가 무한정 계속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르시고 깨닫게 하시고 양심을 찌르시는데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그 강퍅함에 익숙해져서 기회를 모두 잃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으면 나중에라도 진정한 성도가 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자신의 죄성 때문에 갈수록 참된 신자가 될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