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1-11 김영제 목사(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마태복음의 남은 부분은 예루살렘의 끝과 세상의 끝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끝을 향해 집중됩니다. 그런 장면 전환에 본문이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어린 나귀를 그 어미와 함께 끌고 왔고, 예수님은 어린 나귀에 올라타고 가셨습니다. 거기 모인 수많은 무리들은 자신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 위에 폈다고 나오는데, 요한복음에 따르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구원해 달라고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신 것은 본문 5절이 말하듯 스가랴 9장 9절이 예고한 그 왕이 바로 예수님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겸손하게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주제를 무시하고, 그저 은혜롭게 설교하고 적용하자면 나귀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일학교 설교에서는 본문의 초점을 나귀에 맞추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복음성가 중 ‘행복한 나귀’라는 곡을 좋아합니다. 그 가사를 보면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묶여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세상에 욕심에, 죄에, 나 자신에 묶여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그리고 주님을 섬기게 하세요. 주님을 등에 업고 살게 하세요. 그러면 세상은 나를 보지 않고 내 등에 업힌 주님을 보게 되겠죠.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입니다.
은혜롭습니다. 어리석게 세상의 헛된 짐을 지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삶임을 묵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중심 주제는 나귀가 아니라 예수님이시기에 본문을 예수님 중심으로 이해해야 우리의 순종을 나귀에 빗대더라도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환영한 군중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외친 ‘호산나’라는 말은 시편 118편을 인용한 것으로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또 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는데 종려나무는 유대국가의 상징이고, 그것을 흔드는 것은 다른 세력들을 대항해서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강력하게 염원하는 민중의 행동입니다. 그것은 강력한 요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위를 할 때 주먹을 쥐고 팔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나, 선거철 후보에게 힘을 싣기 위한 지지자들의 액션이나, 혹은 운동 경기에서 자기편을 응원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그런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니 자기들의 스승이 환영받는 것에 한껏 들떠 우쭐해졌을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에는 당당하고 멋진 위용을 드러내는 말을 타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보다 몸집이 작고 귀여운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셨으니 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어색한 모습으로 지나가심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환영에 대한 의도적인 반대를 하신 것입니다. 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백성들의 세력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킬 위험인물로 본 것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인지도 말해주는 것입니다.
군중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구약성경 표현을 예수님께 사용한 것 자체는 옳은 것입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든, 구원을 받든 못 받든 예수님은 그들의 칭송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러난 그들의 찬양에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이해가 없는 표현과 찬양에 의미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환영과 찬양을 받으시기보다 오히려 깨달으라고 그들이 이상하게 여길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신 것입니다. 지금은 그들이 환호하지만 얼마 후 돌변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듯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군중들이 보기에 겸손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 참 겸손하시다.’라고 감동을 했을까요? 본문을 기록한 마태와 마태복음을 읽은 초대교회 성도들과 이후로 지금의 우리는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한없는 겸손의 태도를 볼 수 있지만, 예수님을 보고 환호했던 군중들은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돈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했을 예수님의 겸손을 깨닫게 하려고 5절에서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겸손하시다는 것은 말을 타셔야 할 분이 어린 나귀를 타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지지와 환호 속에서 으쓱거리면 뽐내지 않으셨기 때문에 겸손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겸손을 인간 수준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이 보이신 겸손은 죄인들의 무지하고 악한 태도에 정당한 반응을 하지 않으신 것에 있습니다. 어리석은 죄인들의 착각과 흥분, 자기들이 원하는 구원을 위해서 일하라는 압력을 거절하신 방법이 겸손했던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가실 때나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님은 묵묵히 겸손히 자기 길을 가셨습니다. 자신들이 왜 그런지도 모르는 변덕스런 인간들 사이를 지나가시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마땅히 지옥에 보내야 할 자들을 대신해서 죄 없는 예수님이 죽는 일은 부당한 일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뜻이기에 묵묵히 순종하신 겸손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에 드러난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이 뭐라고 하던지 십자가를 향해서 조용히 계속 가신 겸손입니다. 그 겸손을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겸손해도 예수님의 겸손에 가려져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나귀처럼 예수님을 등에 업고 순종하며 살면 세상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환호하던 군중들이 예수님을 여전히 몰라봤던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처럼 나귀 같은 우리도 우습게 여겨질 것입니다. 너 참 겸손하다고, 네 덕분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고 우리가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함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를 따른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인정받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처럼 당할 것이라는 뜻에서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다고(10:25), 어린아이 같이 낮춰야 한다고(18:4), 내 잔을 마셔야 한다고(20:23), 종이 되어야 한다고(20:27)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겸손하게 순종해서 예수님이 높아지신 거라는 만족감을 얻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된 사람의 후보 시절에 보좌하던 사람이 지난 날 온갖 굳은 일을 다 했던 것을 보람으로 여기는 것 같은 자기만족을 성도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의 지극한 겸손마저도 나를 우쭐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생각할 때 우리가 낮아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겸손해져도 예수님보다 낮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겸손한 척하는 것은 존경을 얻지만 참된 겸손은 끊임없는 희생이기 때문에 자기만족보다는 고통을 줍니다. 우리가 겸손해지겠다고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매고 가면 우리는 자기 죄로부터는 점점 자유로워질 수 있지만 세상의 죄로부터는 더 큰 고난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신 것처럼 말입니다.
18장에서부터 예수님은 서열 다툼을 하고, 헛된 보상을 바라는 제자들에게 세속적 기대를 버리고 겸손하게 자신을 따르라고 가르치셨는데, 예수님은 본문에서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게 겸손의 모습인지도 모를 만큼의 겸손이었고, 자신을 찬양하는 듯 했지만 죽게 했던 자들 앞에서의 겸손이었습니다. 진정 겸손하길 원하십니까? 예수님 외에 위로 받을 것, 자랑할 것이 전혀 없음을 깨닫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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