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15-23:3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본문에서 바리새인, 헤롯당원, 사두개인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신앙에 있어서나 이익에 있어서나 서로 연합할 수 없는 종교적, 정치적 세력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명분을 얻고자 연합해서 질문합니다.
먼저 그들은 예수님께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금을 내라고 대답하시면 신격화된 로마 황제를 우상숭배 하는 것이 되어 율법에 저촉이 되고, 반대로 세금을 내지 말라고 대답하시면 로마에 반역하는 것이 되어 체포됩니다. 어떤 대답을 하던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곤란에 빠지게 할 다음 질문은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모세는 부부 사이에 자녀가 없는 상태로 남편이 죽었을 경우 다른 남자 형제들이 미망인을 아내로 삼아 후손을 잇게 했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차례로 죽으면서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면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는 가상의 질문을 그들이 만들어서 했습니다. 그 질문을 한 사두개인들은 육신의 부활, 사후 심판, 천사를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그 조상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 땅에서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 후에는 이 세상에서 혼인하고 가족을 이루는 것과 다른 질서 속에서 산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그 다음 질문은 율법 중에 어떤 것이 가장 크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41절 이후에 예수님은 자신이 다윗의 후손인 동시에 다윗보다 높은 주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에 답하심으로 질문 한 자들의 자기모순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인간 통치자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면서 복종했고, 율법과 성전은 자기들의 사익을 추구하데 사용했습니다. 즉 돈을 위해 이미 가이사와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를 말씀하신 것은 그런 종교지도자들이 물질과 자기 안전을 위해 세상과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음을 지적하신 동시에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구별된 태도를 분명하게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부활을 믿지도 않으면서 부활 이후의 결혼문제를 꺼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구약이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또 율법의 우선순위를 질문한 바리새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율법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백성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율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도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하나님의 본심이 어떻게 담겨 있는 지, 우선순위가 무엇에 있는지는 관심도 없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백성들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서는 그저 많은 조항들 모두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즉 어떤 계명이 크냐고 질문한 것은 자기들에게 필요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은 율법의 진정한 우선순위를 가르치신 동시에 그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도 없다고 정곡을 찌르신 것입니다.
22장의 질문과 대답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어지는 23장에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앞에서 말한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시고, 그들의 삶을 본받지 말라고,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부터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짐 지우는 자들이고, 그것으로 자기들의 권위와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5절 이후를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옷을 화려하게 하고 높은 자리에 앉으려 했고, 인사를 받고 랍비라고 칭함을 받기 좋아했고, 15절을 보면 그들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했고, 성전에 맹세하는 것은 어겨도 되지만 성전에 바칠 돈에 대해 맹세한 것은 지키게 했다는 것입니다. 23절부터 보면 정말 지켜야 할 율법은 안 지키면서 사소한 것은 지키도록 집착했다는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그들은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상태였고 외형은 보기 좋게 꾸몄지만 그 안에는 시체가 썩고 있는 무덤 같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종교지도자들은 본래 구약의 제사장, 왕, 선지자 같은 역할을 했어야 하는데 모두 실패했고, 오히려 그런 직분을 진실하고 바르게 행하던 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31, 32절에서 예수님은 그런 조상들의 후손들답게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35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이 저지른 죄가 그들 자신에게로 징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8절을 보면 예루살렘과 성전에 멸망이 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멸망 받아 마땅한 이스라엘에 대해 37절에서 애틋한 사랑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런 이스라엘을 오랜 기간 인내하시면서 사랑을 깨닫게 하신 것을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을 당연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슬퍼하시면서 탄식하신 것입니다. 또 39절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게 될 때에 기회가 주어진다는 소망을 남겨두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먼저 종교지도자들의 죄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없이 종교적인 것들을 행할 때 그 모든 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압도되어 겸손해지기보다는 높아지려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구원을 얻지 못하고, 남들도 막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멋지게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낮아지게 하며, 추한 자신을 깨닫게 하여 주님을 필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겸손하게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먼저 된 만큼, 더 많이 깨달은 은혜만큼 더 많이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는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그들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심판 받아 마땅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시면서도 예수님은 그들에 대한 애틋함을 언급하셨고 회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요즘 우리가 자주 다루는 주제인 하나님이 구원하실 자들을 선택하신 것과 멸망할 악인을 사랑하시는 것이 함께 가는 것이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구원 받지 못할 자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이성적으로 명쾌하게 납득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런 사랑 때문에 우리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구원할 자를 감정 없이 그냥 선택하고 책임을 다하는 메마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멸망할 자들에 대해 슬퍼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사랑도 인격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에, 자신을 끝까지 반대한 자들도 사랑하신 주님을 알 때에 우리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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