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혼인잔치에 초청된 자들 (마 22:1-14)

따뜻한 진리 2018. 5. 13. 15:10

마태복음 22:1-1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앞에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상태를 드러내는 두 가지 비유, 두 아들 비유악한 포도원 농부들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본문에서 비유 하나를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는 이렇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풀려 했습니다. 초청받은 사람들이 오기 싫어하자 임금은 다시 종들을 보내서 모든 것이 준비된 잔치의 풍성함을 설명했지만 초청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핑계로 거절했고, 설득하러 온 종들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화가 난 임금은 군대를 보내서 그 악한 자들을 진멸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은 다시 종들을 보내 길거리 이곳저곳에서 만나는 누구든지 혼인 잔치에 초청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에는 손님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주인이 손님들을 만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고는 종들을 시켜 그를 쫓아냈습니다.

 

    이 혼인잔치 비유에는 앞의 두 비유와 유사하게 어떤 부탁을 받는 자들이 부탁과 부탁하는 자들을 거절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들들에게 부탁을 한 아버지, 종들에게 명령을 한 포도원 주인, 잔치에 초청을 한 임금은 모두 거절당하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일하러 가지 않는 아들, 악한 농부들, 잔치를 우습게 알고 참석하지 않은 자들은 먼저 부름 받고 쓰임 받은 이스라엘,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정당한 반응을 하지 않고 불순종했음을 비유들이 말합니다.

 

    세 비유의 또 다른 유사점은 뒤늦게 순종하거나 기회를 얻는 자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거절했다가 순종하는 아들, 악한 농부들이 진멸된 후 일할 기회를 얻는 다른 농부들, 길거리에서 초청을 받아 혼인잔치에 들어오는 자들이 그렇습니다. 이들은 이방인과 죄인으로 여겨졌던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혼인 잔치 비유에는 앞의 두 비유와 달리 나중에 기회를 얻는 자들이 좀 더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초청을 거절한 자들 때문에 나중에 기회를 얻은 자들이 혼인 잔치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주인은 그들이 예복을 입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잔치에 초청받은 자들에게 예복은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예복을 안 입은 것 때문에 내쫓는 것이 너무 지나치게 여겨져서 4절에서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라는 내용을 근거로 임금이 예복까지도 다 준비해 놓았던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또 이스라엘 풍습 상 부유한 혼주는 하객이 입을 예복도 준비한다는 설명도 합니다. 즉 초청받은 자들이 입기만 하면 되는데 안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옳아서 혼주가 준비한 옷을 입어야 하든, 자기 집에 있는 예복을 입든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자는 준비된 옷을 입고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13:14절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와 연관시켜서 초대받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예복을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훨씬 은혜롭겠지만, 본문에서 임금의 아들은 예수님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을 또 다시 예복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문제까지도 피하기 위해 예복을 예수님 자체가 아닌 예수님의 의, 예수님으로 인한 칭의라고 해석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찌 됐든 본문에서는 그 옷이 예수님의 의, 칭의라는 것을 이해시키려는 일에 목적이 있기 보다는 잔치에 들어온 자들 중에도 쫓겨날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앞의 비유 두 개에서는 이스라엘의 본 자손들이 기회를 잃고, 이제는 이방인들과 모든 죄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앞의 두 비유는 이스라엘과 그 종교지도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본문의 세 번째 비유는 이방인들이 포함된 교회에도 각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후순위의 자들에게 기회가 넘어간다고 해서 주인은 자신이 베푼 은혜가 함부로 여겨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나중에 아무데서나 초대되어 잔치에 들어온 자들은 우리 같은 자들을 초대한 것을 보니 돈이 많은가 보네.’하고 임금의 은혜를 비꼬아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공짜, 거저라고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와서 음식이나 먹겠다고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러기가 쉽습니다. 상대가 큰 호의를 베풀면 정말 몸 둘 바를 모르면서 자신이 갖춰야할 합당한 태도로 최대한 겸비하려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은혜 베푸는 자가 여유가 많아서 과시를 하고, 남아도는 것으로 선심 쓰는 것으로 여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고, 진정한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은혜를 거저 누리기는 하지만 잔치의 주인공과는 거리를 둔 채, 소외된 채로 있는 것입니다. 초대받은 자들은 임금의 아들 덕분에 자격 없는 자기에게 은혜가 베풀어진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미친 은혜가 누구 때문인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잔치에 초대한 임금의 마음, 그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예복 입는 것으로 드러나야 했습니다. 그것이 초대한 자의 은혜에 부응하는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 예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든,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자녀로서의 신분이든, 하나님 나라는 자격 없는 자가 아무 조건 없이 거저 잔치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것이 싸구려 잔치, 남은 음식을 먹으라고 부른 잔치가 아닙니다. 이방인인 우리에게 복음의 문이 열린 것은 안 팔린 음식을 마감세일로 사갈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을 우리가 알아보고 믿는다고 해서 우쭐하며 방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다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교훈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온전히 이해하는 가운데 구원 얻게 하시는 것이고, 이스라엘보다 자격 없는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겸손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나타나듯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 하나님 나라 잔치에 영원히 함께 거할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구원할 자들을 선택하셨지만, 한편으로 성경은 자기 사람들을 열심히 찾으시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역대하 169절은 보면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말하고 있고, 복음서 곳곳에도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잃은 양을 찾으십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자만이 모든 것을 팔아 그것에 올 인하는 것처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에 우리는 단 한 번의 인생이라는 구원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성으로는 감히 들어갈 수 없는 자신의 나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선택받은 자라면 그 나라가 죄인인 나에게 걸맞은 곳이 아님을 알고, 이 죄인의 부끄러움을 어떻게 가리고 잔치의 주인공 앞에 서야할지를 생각하면서 거저 주어진 기회를 잃지 않기 위해 잔치의 주인에게 의존할 것입니다. 결국 택함 받은 자들은 자기를 그곳에 있게 한 그 잔치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집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자기를 겸비하고, 그리스도에 맞게 자기를 바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청함 받았고, 또한 택함 입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