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4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시내산 정상에 최소 여덟 번 올라갔다 내려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처음부터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20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네 번째로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산 아래 백성들에게 들리도록 십계명을 음성으로 말씀하셨고, 21장에서 23장에 나오는 나머지 율례들은 모세만 하나님께 듣고 내려와서 백성들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 다룬, 이웃에 대한 책임을 다루는 내용이었습니다. 본문 24장에서 모세는 또 다시 시내산에 두 번 오릅니다. 한 번은 이스라엘 장로들과 오르고, 다른 한 번은 십계명 돌판을 받기 위해 오릅니다.
그 내용들을 살피면, 앞의 21~23장의 내용을 백성들이 전해 듣고는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모세는 소를 잡아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 피의 절반은 제단에, 절반은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그것이 여호와께서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 모세는 장로들과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 장로들을 올라오라 하셨지만 2절에서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장로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정상까지 간 것이 아니라 시내산 중턱 쯤 까지 갔을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모세 외에 백성들과는 거리를 두셨습니다. 거기서 장로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거리를 두고 어렴풋이 목격하고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제사를 행하게 하시고, 피를 뿌리게 하시고, 그 대표들인 장로들이 하나님께로 좀 더 가까이 나오도록 허락하신 것은 십계명, 율법을 두고 새로운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 언약은 엄중한 동시에 축하를 하는 기쁜 사건이었습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라고 말합니다. 이런 장면은 신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불과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자신과 거의 동등한 상대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매우 영광스러운 장면이고, 인간의 존재 목적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을 뵙고 음식을 먹는 것,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만족을 느끼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장면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인 예배를 그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십계명을 음성으로 들려주실 때는 하나님께서 두려운 상황들을 조성하셨다면, 이제 돌판에 새겨주시기 전에는 친밀한 교제를 허락하셨습니다. 예배에는 그런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할 때에 사람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 예배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상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지키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셨습니다. 또 법을 주셔서 세상 사람들처럼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죄와 몸부림치며 싸우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통해서 사람이 짐승이 되지 않고, 욕망과 이익을 위한 부속품으로 전락하지 않고, 하나님과 다른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따라 죄에 저항하면서 살아야 자신의 죄성과 무력함을 깨닫고, 구원이 은혜인 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즉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구원하시고, 말씀하시고, 자기가 누구인지 알려주시고, 길을 인도하시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셨다는 것은 인간이 제 멋대로가 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라는 규칙을 앞에 두고 자기 정체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법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자신의 정체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3절과 7절에서 백성들은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율법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채지도 못하겠지만, 율법에 순종하는 일에도 실패할 것이고, 율법을 문자 그대로 잘 행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언약의 피를 뿌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런 피와 같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는 것이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이 불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돌판을 주시기 전, 피를 뿌림으로 자신이 언약의 모든 실행과 혜택을 보장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계명, 율법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고, 율법의 요구대로 완성하는 일에도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뿌리신 언약의 피처럼, 예수님께서도 피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성만찬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주시면서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뛰어남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시작하거나, 우리의 노력으로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주심으로, 은혜로 거저 생명을 제공해 주심으로 관계가 시작되었고,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피,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피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피를 보면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 의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율법을 주시면서도 자신이 책임지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보면서 그것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불신하고,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의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담이 가진 생명보다 나은 생명을 얻은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완성하신 그 율법에 우리도 성실히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발견하게 되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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