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28-3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고난당해야 함을 말했습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고난을 피하기 위해 종교에 의존하는데, 십자가는 신앙에 의해 인생의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성도에게 다른 작용을 하고, 다른 의미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그렇게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무율법주의자가 되거나 성령으로 인해 이상한 초월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지게 됨을 말합니다, 피조물답게,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녀답게 고난에 반응 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다움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경륜, 즉 29절에서 말하는 미리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지혜롭게 계획하신 이 과정들을 지나가게 됩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고난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도 성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멀어지게 할 수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환난이나 역경이나 박해나 굶주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무력화하거나 의심케 할 수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데 31절에서 34절은 신자들에게 잘못된 특권의식을 불어넣어주는 구절로 사용되곤 합니다. 31절을 보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 믿는 자를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 감히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종을 비판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는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자기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주셨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만을 주시고자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성도가 바라는 좋은 것, 구하는 것을 아낌없이 주시려고 한다는 기복주의나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니 긍정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얻고자 하는, 쟁취하는 신앙을 갖자고 말하는 승리주의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특히 “모든 것”에 욕망을 담아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에서 “모든”은 세상 사람들도 부러워할만한 갖고 싶은 모든 것들이 아니라 28절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의 “모든”과 같은 뜻입니다. 즉 세상 모든 피조물과 함께 고난당하는 것,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을 두게 만드는 여러 가지 고난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17절의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와 연속되는 내용입니다.
또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는 세상 그 누구도 신자를 비판할 수 없고, 신자가 어떤 잘못을 해도 세상의 꾸짖음을 들을 필요도 없고, 고개 숙이지 말고 당당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누구보다 가장 흠이 없고, 무결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감히 누구도 우릴 건드릴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성도가 고난당하는 것에 대해 세상 불신자들이 늘어놓는 조롱과 비방, 사탄의 고소가 무력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신자는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인 우리가 고생하고, 안 좋은 일을 겪을 때 하나님을 의심하는 이유로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자기 백성이 이런 일 당하도록 왜 내버려두시냐?’,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는데 왜 이런 일이 너한테 일어나는 것이냐?’, ‘이렇게 참혹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들을 합니다. ‘네가 겪는 것을 보니 네가 주장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사람들은 ‘예수가 남들은 구원했는데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 군, 네가 왕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봐라’라고 조롱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자라면 왜 고난을 당하지?’라고 비웃습니다. 세상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을 불신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사탄 역시 그런 의심을 우리 마음에 뿌려서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고난당함이 하나님을 의심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사용하실 뿐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도 고난과 죽음을 허락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당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미리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일을 고난 속에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난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누구도 비방할 수 없고, 그것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일들이 성도의 구원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은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고, 고난을 허용하는 신은 신이 아니라고 비판하면서도 자기가 스스로 자초한 고난은 숭고하게 포장합니다. 자기가 선택한 고생과 도전을 순례, 성장을 위한 발판이라고 미화합니다. 역경을 딛고 승리한 것이라고 감동을 자아냅니다. 그것은 고난당하시는 하나님,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은 매도하면서 자기 고난은 신성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나타내시고, 자신을 신뢰하도록 일하실 때 인간의 수준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신뢰할만한, 죄인들의 성향에 맞는 일들만 하셔서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들, 하나님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의심을 품고, 하나님은 없다고, 믿을 만하지 않다고 여길만한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인간의 판단보다 자신이 옳은 것이고, 선한 길이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런 요소 중의 하나가 고난입니다. 고난이 악한 것이고, 나쁜 것인 줄 알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죄를 다스리고 죽음을 이기고, 사탄을 무력화 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임을 우리가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싫어하고 불평하는 고난, 불신하게 만드는 고난을 사용하셔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광을 얻으십니다. 또한 구원받는 자들도 그런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게 하실 뿐 아니라 그런 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아들을 고난에 처하게 할 수 있냐고, 십자가가 어떻게 복음이냐고 조롱하고 불쾌해 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신앙생활 하던 초대교회 성도들, 그리고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은 자신들의 고난당함이 하나님을 의심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신뢰할 이유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6절에서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라는 시편 42편의 말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고난이 계획된 것, 예정된 것, 당연히 일어날 일임을 말합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고난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의심할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자체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고, 비방하는 불신자와 사탄의 세력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보람된 인생을 살고자 노력해야 하지만, 고생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까봐 실패를 두려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의 생이 허무하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에 대해서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난이 우리의 삶을 무너뜨린다 해도, 죽게 한다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흔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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