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위대한 하나님의 선택 (롬 9:1-29)

따뜻한 진리 2019. 6. 9. 17:19

로마서 9:1-2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가 로마서를 살피면서 확인한 대로 당시 로마교회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중 이방인 신자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집단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믿음과 함께 자신들에게 익숙한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생각에 영향을 받았고, 이방인 신자들은 율법 없이 믿음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무율법주의와 성령에 대한 오해로 방종하고 무책임하기 쉬웠습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민족 전체가 집단적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사건 이후에도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이방인들이 더 많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유대인들에게서 자신들에게로,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옮겨졌다고 생각했고 오늘날까지도 그런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에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은 바울이 동족을 등한시한다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반대로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버리셨다고 바울도 생각할 것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본문 3절을 보면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저주를 받는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결코 이스라엘 유대인들을 모두 버리신 것이 아님을 구약을 근거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 전체를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 상당수가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 가운데 구원받을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야기부터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복 주시기로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손인 이스마엘은 버리시고, 오직 이삭만 선택하신 것, 또 이삭의 아들 중에서도 에서는 버리시고 야곱만 선택하신 것을 보면 단지 아브라함의 자손, 혈통적 유대인이 모두 구원받는 것은 처음부터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기가 속한 족보나 혈통 같은 인간적인 가치들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교훈을 강하게 전달하기 위해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이야기 합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이 애굽왕 바로는 마음이 교만하게 하셔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시고 모세는 순종하게 하셔서 구원의 계시를 그를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또 바울은 출애굽기 3319절의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는 말씀을 15절에서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말합니다. 또 바울은 이사야 29장을 인용해서 토기장이가 같은 흙을 가지고 귀한 데 쓸 그릇과 더러운데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는 것에 대해 아무도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이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혈통 상 유대인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전체가 버림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능하시거나 변덕스러우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반대로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그들이 착해서, 뛰어나서,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밖에 있는 자들을 우습게 여기면서 자신의 구원에 대해 자만하거나, 자기를 특별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어느 한 쪽이 배타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선택하셨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대로 하나님이 어떤 자들을 선택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본성적으로 좋은 기질을 가져서도 아니고, 삶 속에서 더 많은 선을 행하고 악을 덜 행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또 더 좋은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으로 예견하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고린도전서 1장이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하듯 구원 받은 우리가 겸손하도록 하시려고 조건 없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선택, 예정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 성경의 하나님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믿는 자들 중에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미리 정하셨다는 주장이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고, 또 사람을 그렇게 여기는 것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도 모욕하는 것이라고 공격합니다. 또 예정론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자기가 선택한 사람은 어떻게든 구원하실 것이니까 우리가 애써 하나님을 찾고, 믿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럼 과연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그 예정이 우리의 자유를 짓밟을까요? 우리가 엄청나고 고귀한 인격과 자유를 가지고 있는데 예정론이 그 자유를 옭아매는 것 같지만, 사실 죄인인 인간은 별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좋아서 어떤 것을 선택할 때 왜 그것을 선택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수두룩합니다. 인생을 채우는 대부분의 것들이 전적인 나의 선택으로 이뤄지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나 자신을 정확히 알고, 또 선택해야 할 대상이 어떤 것인 줄 바르게 파악하고 선택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내가 이 물건, 이 음식, 이 색깔, 이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선택 하는 그것, 그 사람이 정말 나에게 유익할지, 고통을 줄지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구원받지 않은 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선택은 죄의 성향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선택은 그렇게 위험의 연속입니다. 그것을 깨뜨리고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 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의 자유보다 하나님의 자유가 더 크고 놀랍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여겨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셨어도 모든 죄인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피조물로서의 겸손한 태도로 죄인 된 비참함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단 한번 뿐인 인생 속 모든 선택의 기회들을 활용해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지키기 위해 죄와 싸우면서 인생의 유혹과 고난을 이겨내고, 마음이 변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낸다 해도, 그 선택이 나의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나의 탁월한 선택, 나의 탁월한 믿음 때문이라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탁월하다 해도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비교할 수 없이 더 위대하고,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택보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더 지혜롭고 선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을 비인격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인격적인 존재가 되도록 구원합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모두를 선택하신 것도 아니고, 신약시대의 이방인 모두를 선택하신 것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어떤 나라, 어떤 계급, 어떤 교회에 속해 있느냐도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선택, 예정은 성도를 특권의식에 빠지게 하지 않고, 무력하고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하게 하고 다른 자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게 합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 중 다수를 차지하는 이방인 신자들이 교만하고 방자하게 행할 이유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도는 신앙이 깊어질수록 많은 것을 깨달을수록 그것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들이라면 ,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들을 누릴수록 자신의 어떠함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부르신 은혜를 고백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