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성도를 겸손케 하는 구원의 기회 (롬 11:1-36)

따뜻한 진리 2019. 6. 23. 17:55

로마서 11:1-3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앞의 9장에서부터 본문 11장까지 바울이 말하려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고 주로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 일이 일어난다 해서 이방인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애초부터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을 나라로 세우신 이유는 결코 사람의 조건,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나는 모든 후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만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거기엔 사람의 노력과 공로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첫 자녀인 이삭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주어졌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자격이 없지만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많은 복을 주셔서 다른 나라 이방인들이 부러워하고, 시기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시대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수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복음으로 구원받는 것임을 이미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그렇게 쓰임받는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기보다 특권의식에 빠져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배척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그들의 교만과 불신 때문에 빼앗긴 기회를 이방인들이 대신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신자들은 자신들이 잘 해서 기회를 얻은 것이 아니라 먼저 선택 받고 기회를 얻은 이스라엘이 잘못했기 때문에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도 잘난 체하거나 유대인들을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주신 기회를 언젠가는 거두시고, 다시 기회를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원래 가지인 이스라엘도 잘라내 버리셨는데 하물며 이방인인 자들이라고 잘라내시지 않겠냐고,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도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았는데, 하물며 원가지인 이스라엘도 다시 회복시키지 않으시겠냐고 말했습니다. 또한 유대인인 바울 자신을 구원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버리시지 않으신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도 언제든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예정하신 이방인들의 구원의 수가 차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많은 유대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 전체가 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 시기가 되면 어떤 이방인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중심이던 때에도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듯, 또 신약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이방인들이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에도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있었듯,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다시 유대인들에게 초점을 맞추시는 때라도 이방인들 중에도 구원받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세가 바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온 세상이 죄로 물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복도 주셔서 이방인들이 시기 질투하게 하셨고, 지금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돌에 걸려 넘어진 후로 이방인들이 누리는 구원의 기회 때문에 유대인들이 시기하는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역전되어 다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시기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에 속하는 우리는 현재 주어진 기회, 구원의 은혜 때문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잘남,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 속에서 누구도 잘난 척 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유대인과 이방인이 기회를 놓치는 것, 서로가 시기하게 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부각되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는 마태복음 22,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혼인잔치 비유입니다. 임금이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준비했는데, 초대한 사람들이 여러 핑계로 거절하자 길과 산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을 초대하는 내용입니다. 또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두 아들 비유, 흔히 탕자 비유라 말하는 이 비유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추잡한 삶을 살다온 아들과 항상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를 기뻐하지 않는, 그래서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는 아버지에 대해 불만을 품는 아들이 등장합니다. 두 비유 모두 자신들이 얻은 기회, 누리고 있는 지위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왕과 아버지의 은혜가 부각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 모여 있는 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신들에게 구원 받을 기회, 참된 신앙생활 할 기회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처럼 사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날에 더 이상 하나님이 은혜를 부으시지 않는 척박한 영적 상황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지역과 집단에는 풍성한 구원의 기회를 계속 주시지 않습니다. 한 때 참된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목숨까지 내놓은 수많은 자들을 낳은 지역들, 나라들이 지금은 교회 건물들만 남아 있습니다. 한 지역을 바꿔놓는 영적 대각성과 부흥이 일어나도 그 영적 상황이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경험한 자들이 모두 참된 성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정시기와 사건과 공간들을 통해서 구원하실 자들을 불러내시고 나면 그 기회는 지나갑니다. 우리나라가 복음화 된 후로 교회가 급성장하면서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가 쇠퇴하고 있습니다. 신자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조국교회에 부흥과 개혁을 주셔서 기회를 계속주시길 바라지만 안 주실 수도 있습니다. 유럽의 나라들에 큰 구원의 기회들이 지나고 오랜 기간 극소수의 신자들만 남아 있는 상태인 것처럼 우리도 그런 상태로 접어들게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고 긴박하게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랑할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지 구원받은 나, 나의 신앙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인한 은혜로운 감정을 갖고 있을 때 신자는 저돌적이고, 흥분에 휩싸여 정신없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은혜의 무게로 인해 진중해지고, 주의하고, 인내하는 자가 됩니다. 20절에서 바울이 말한대로 신자는 높은 마음을 품지 않고 도리어 두려워하게 됩니다. 우리가 바른 진리, 바른 복음을 추구하는 것도 남다른 나의 무엇을 가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죄의 유혹과 자기 자랑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겸손히 의지하는, 믿음으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바른 길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길 가지 않는 자들과 비교해서 자기를 더 높게 여기기 위해서 아닙니다. 은혜를 더욱 순전하게 의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어떤 것이 아닌, 오직 성경, 은혜, 믿음, 그리스도를 추구하며 바울이 33절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고 말한대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 선하심, 은혜로우심을 영광스럽게 찬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