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6-27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다윗이 십 광야 하길라 산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얻은 사울은 또 다윗을 잡으러 그 근처까지 왔습니다. 사울이 잠시 쉬기 위해 머문 장소에 다윗이 부하와 함께 몰래 갔습니다. 부하 아비새가 명령만 하면 사울을 죽이겠다고 말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울의 칼과 물병을 가져온 뒤에 멀리 떨어져서 사울과 군사들을 깨우고는 자기가 다녀간다는 것을 확인시킵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19절을 이해하기 쉽게 새번역 성경을 참고하면 ‘왕을 충동하여 나를 치도록 시키신 분이 주님이시면, 나는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왕을 충동하여 나를 치도록 시킨 것이 사람이면, 그들이 주님에게서 저주를 받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유산으로 주신 땅에서 내가 받을 몫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나더러 멀리 떠나가서 다른 신들이나 섬기라고 하면서, 나를 쫓아낸 자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사람들은 다윗을 이방 나라로 추방시키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그 지역에만 한정되어서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영토를 벗어나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 밖으로 벗어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사람들은 다윗이 이스라엘 지역을 떠나 하나님과 무관하게 되고, 하나님이 세우실 나라와 기업과 복에서 제외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약속이 유효한 땅을 벗어나면 다윗에게 약속된 왕의 자리도 취소될 것이고,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다윗은 사울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저주와 같은 모욕적인 말을 들은 것을 사울에게 토로하면서 자신을 핍박하지 말라고 한 번 더 말합니다. 사울이 반성하는 듯 했지만 사울과 다윗은 자기 길로 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7장을 보면 다윗은 사울의 사람들이 원하던 대로 다른 나라 블레셋의 영토로 망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주적인 블레셋의 용병 역할을 하며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블레셋의 한 지역인 가드의 아기스 왕에게 허락을 받아 시글락이라는 곳에 자기 사람들과 1년 4개월간 거주하게 됩니다. 그 동안 다윗은 아말렉 족속을 비롯한 이방족속들을 공격해놓고는 아기스에게는 이스라엘 부족을 공격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합니다. 아기스는 다윗이 자기 동족에게 미움 받을 짓을 하니 이스라엘로는 절대 돌아가지 못하고 자기에게 계속 충성할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렇게 속인 사실이 들통 날까봐 한 번 공격한 부족들은 몰살하여서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전멸시키라고 말씀하셨던 아말렉 족속이니 다윗이 잘 한 일이라고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다윗은 생존을 위해 잔혹한 전쟁을 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그동안 다윗은 21장에서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했고,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척 했고, 나발에 대해 보인 반응도 바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잘못으로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위기를 겪거나 위험에 빠질 뻔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자기에게 저주한 자들의 말대로 이방으로 가버렸습니다. 다윗이 또 다시 블레셋으로 피한 것은 지금까지 수없이 자신을 돌봐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것이고,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의 잘못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서 세워지는 일이 성취되도록 하나님께서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다윗의 행한 일들을 충분히 죄라고 지적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였지만, 여전히 그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자였습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해 가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는 사울과 다윗이라는 두 사람이 도덕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고 다윗이 점점 사울을 닮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두 대상을 극명하게 차별하십니다. 다윗의 죄를 덮으시고 참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지 못할 자들도 세상을 사는 동안만큼은 대체로 잘 되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중요한 은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 은혜가 무엇이라고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죄를 가려주시는, 묵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에게 주시는 가장 위대한 것은 세상에서 어떤 좋은 일을 경험하는 가에 있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잠시 미루어진 짧은 기간입니다. 형 집행을 앞 둔 사형수와 같은 삶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 죄인인 자신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위해 칼을 갈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도 없고, 심판 따위도 없다고 여기지만 결국 마지막 때 죗값을 영원히 치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자격이 없지만 선택하셔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자신을 알게 하십니다. 구원받은 자는 자신의 죄를 보고 괴로워하지만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죄 없다고 선포하시며, 죄인이었던 과거에 대해 영원토록 묵인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덮어 주시는 이 은혜를 모른 채 살아간다면 흔히 은혜라고 말하는 이 땅에서 잘 되는 것, 위기를 잘 빠져나가는 일들은 착각을 가져오는 허망한 일이 됩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많은 은혜를 누리고, 다윗을 통해서 용서의 은혜를 입게 하셨어도 소용이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죄인인 나를 받아주시고 참으시는 하나님의 이 은혜를 모른다면 다른 은혜는 말기 암환자에게 주어지는 강력한 진통성분의 마약과 같습니다. 사울이 다윗으로부터 경험한 은혜와 같은 것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고통이나 불행을 겪을지라도 그 정도로는 우리가 죄인인 것에 상응하는 징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왕 때문에 겪은 고난은 다윗 자신의 죄에 상응하는 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다윗의 죄와 실패에 대해 침묵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겪는 인생의 곤란함과 고생은 우리 죄의 대가가 아닙니다. 본성상 죄인이고 말할 수 없이 많은 죄를 짓는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더 많은 고통을 겪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심판을 유보시키시고 기회를 제공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정리하면 우리의 인생과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안락함은 예수님 때문에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입니다. 또 인생 중에 일어나는 괴로움은 진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으심 중에 흘러나오는 진노의 콧김에 불과합니다. 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영원토록 얻고 싶다면 우리는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속히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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