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4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24장에서 다윗은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그 일로 사울은 반성하고 달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서 선지자 사무엘이 죽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저 아래쪽의 바란광야로 피합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의 죽음으로 사울은 눈치 볼 사람이 사라졌으니 더 마음대로 할 것임을 다윗은 예상했기 때문에 더 먼 바란 광야로 피신한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눈물과 태도를 어떻게 여겼을지 재확인되는 장면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위협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긴장감 때문에 힘들기도 했겠지만, 자신이 거느렸던 수백 명의 사람들을 돌보는 일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생스런 광야 생활 중에 다윗은 나발이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4절에 나발이 양털을 깎았다고 하는데 이는 잔치나 추수하는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회가 좋으니 다윗은 나발로부터 뭔가를 얻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고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5절에서 8절을 보면 다윗은 자기 소년 열 명을 나발에게 보내면서 그에게 아주 정중하게 할 것을 일러줍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동안 나발 당신의 소유물이 안전하도록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으니 이번에 음식을 좀 나눠달라는 내용을 전달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나발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즘 주인한테서 도망치는 종들이 많다던데~’하면서 다윗을 조롱하고 자기의 것을 주기가 아깝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다윗의 소년들은 이 좋지 않은 결과를 다윗에게 전했고, 다윗은 분노에 차서 나발을 죽이겠다고 자기 사람들을 무장시켰습니다.
다윗은 매우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지난 시간에 잠깐 언급했지만, 다윗은 감정이 무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술가들이 가진 예민하고 기복이 큰 정서를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편의 내용을 쓸 수 있었고, 골리앗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뛰어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그런 성품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점이 이렇게 문제가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다윗은 그동안 나발의 재산을 자기가 지켜주었는데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앞의 24장 17절에서 다윗은 사울한테서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윗은 나발보다 더 큰 위험과 고통을 주는 사울의 악함은 이겨내고 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에 비하면 큰 위험이나 고통을 준 것도 아닌 나발은 참아내지 못합니다. 상대적으로 사소한 일에 더 취약함을 드러내는 사람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명목상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의 죄에 대해서는 잘 참아내지만 상대적으로 힘이 없고, 무시할 만한 상대에게는 넉넉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다윗과 나발 사이에 일어난 일을 나발의 종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전했습니다. 다윗이 지금까지 있는 동안 나발의 재산이 안전하도록 도움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발이 다윗의 요청을 수치스럽게 거절한 것, 그래서 다윗이 나발의 것들을 멸하려고 온다는 말을 전해들은 아비가일은 급히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아비가일은 상당한 양의 떡과 포도주와 양과 곡식과 건포도와 무화과를 준비했습니다. 아비가일은 일군들과 함께 그것들을 나귀에 싣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보이자 급히 내려서 땅에 바짝 엎드렸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한 말이 24~31절까지인데, 그 중 26절 하반절에서 아비가일은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의 원수들, 다윗을 헤치려는 원수는 누구입니까? 사울입니다. 아비가일은 사울과 나발을 연결시킵니다. 아비가일은 사울에 대한 미움을 다윗이 떠올리게 한 것입니다. 사울로 인한 고통과 원통함에 비하면 나발이 주는 고통은 무시할 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나발에 대한 분노는 상대적으로 누그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28절에서 아비가일은 “여호와께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비가일의 말은 지금까지 다윗이 흠 없이 여호와께 순종했기 때문에 자기를 통해 나라를 세우실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비가일은 다윗의 일생에 악한 일을 찾을 수 없다고 단정해서 말합니다. 그 때 다윗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지금 저지르려는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는 일에 오점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입니다.
31절에서도 아비가일은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니이다”라고 말하면서 다윗이 나발을 죽인다면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에 후회할 일이 될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다윗이 왕이 될 때에 자신의 양심에 가책이 될 수 있고, 또 반대자들의 비난과 공격의 근거로 사용되어 후회스럽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비가일의 말로 다윗의 분노는 다스려졌고, 다윗은 그런 아비가일을 지혜롭다고 칭찬합니다. 아비가일은 있었던 일을 남편 나발에게 전했고, 나발은 그 충격으로 낙심했다가 여호와께서 치셔서 열흘 후에 죽게 됩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는 그저 한 여인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 성령이 주신 지혜의 결과입니다. 성령께서 다윗에게만 직접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주변 인물인 아비가일에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다윗 역시 연약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은 다윗이 왕으로 세워지는 일에 문제가 없도록 그가 치명적인 실수를 할 위기에서 구하셨습니다.
또 이러한 아비가일의 말들이 지시하는 것은 다윗을 뛰어넘습니다. 28절의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라는 이 과분한 칭찬은 참으로 죄 없으신 예수님께 걸맞은 찬양이며, 또한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가 죄 없다고 여겨지는 상태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윗 자체로는 그러한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아비가일의 말들은 다윗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반성하게 하는 일에 충분했지만 다윗에게는 과분한 내용이었고, 완전한 미래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6, 28, 31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한 말은 요청이 아니라 사실 찬양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원수를 처벌하지 않고 용서하는 왕, 악한 일을 찾을 수 없는 왕, 후회할 것이 없는 왕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왕이십니다.
이러한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개입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비가일처럼 지혜로운 말로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하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다른 사람 이전에 우리 자신에게 그런 지혜로운 개입이 필요합니다. 그 지혜로운 개입을 누가 하십니까? 바로 성령께서 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성령께서 개입하셔야 합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는 다윗에게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분노를 잠재웠습니다. 다윗처럼 우리에게도 미움과 분노가 찾아옵니다. 이 미움과 분노는 우리가 죄 짓게 되는 빈번한 요인입니다. 사소한 분노 때문에 위기를 만나는 일이 많습니다. 또 깊은 원한을 갖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러한 상태에 어떻게 개입하십니까?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면서 고백했던 것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그가 사울의 목숨을 여호와께 맡긴 일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하시어 나의 미움과 분노는 내가 판단 기준이었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진정한, 궁극적인 판단자이심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미워하기 전에,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보고, 다른 사람의 심판도 맡길 수 있습니다.
또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자신을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실 것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장래의 영광을 통해 현재의 죄의 유혹과 고난을 이겨내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흠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아비가일이 다윗을 일깨운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순간순간 그리스도가 생각나게 하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다고 여김 받는 자임을 기억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죄로 더럽히지 않아야 하겠다는 거룩한 열망을 갖게 되고, 우리가 누릴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영광을 고대하는 것으로 현재의 유혹과 고난을 넉넉히 이겨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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