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은혜를 통해 안도감만 챙길 것인가 (사무엘상 24장)

따뜻한 진리 2020. 8. 30. 20:21

사무엘상 24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그일라 백성들을 도와주었다가 배신을 당한 다윗은 십 광야로 피했지만 그곳이 누군가에 의해 사울에게 알려집니다, 다윗이 다시 엔게디 요새에 숨었는데 또 누군가가 사울에게 그 숨은 곳을 알려주었고, 사울은 다윗이 있는 곳 근처까지 왔다가 용변이 급했는지 어떤 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 다윗이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군사들은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주신 기회라고 말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못하게 했고 사울의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사울이 굴에서 나갔을 때 다윗은 뒤에서 사울을 불렀고, 자기가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옷자락만 잘라내고 살려주었다는 것을 확인시킵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시작됩니다. 8절부터 21절까지가 그 대화의 내용입니다. 그 중 15절까지는 다윗이 사울에게 한 말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사울에 대한 태도가 드러납니다. 11절에서 다윗은 사울을 “내 아버지여”라고 부릅니다. 또 다윗은 사울을 “왕”이라고 칭합니다. 8절에서 15절 사이에서 “왕”이라는 말이 몇 번이나 사용되었을까요? 16번이나 사용됩니다. 그리고 8절에서 다윗은 사울을 향해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그는 사울 왕에 대한 예의를 최대한 갖춥니다.

 

    그러면 다윗이 사울을 왕으로서 존경했기 때문에 살려둔 것입니까? 아닙니다. 6절에서 다윗은 자기 군사들에게 사울을 죽일 수 없는 이유를 말하는데, “여호와께 기름부음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두 번 말합니다. 그리고 10절에 가서 다윗은 사울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에게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살려주었음을 사울이 분명히 알도록 합니다. 다윗은 여러 반복되는 표현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사울 당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살려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원수와 같은 사울과의 사이에서 하나님을 우선시했습니다.

 

    또 다윗은 “내 손으로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라고 12절, 13절에서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다윗이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사울을 죽이지 않겠으니 안심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앞으로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합니까? 그 속뜻은 ‘사울 당신이 안 변할 것을 나는 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변화를 기대했다면 다윗은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왜 여호와께 호소합니까? 다윗은 자신이 이렇게 까지 하지만 사울에게는 별 기대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원수에 가까운 사울을 끝까지 살려둡니다. 사울에 대한 다윗의 자세는 정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고상하고, 감정이 절제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주권을 확실하게 신뢰했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다윗이 사울에 대한 아무 증오심도 없고, 자신이 고생한 것에 대한 원망도 없어서 그랬을 거라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다윗이 악인과 악행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이어서도 아닙니다. 골리앗을 상대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골리앗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욕되게 하는 것에 대해 다윗은 강한 증오심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또 시편을 보면 다윗의 악인에 대한 분노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어쩌면 다윗은 인간적인 억울함과 한 맺힘이 가득했지만 하나님 때문에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면서 사울에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통해 사울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의 과정이 그렇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선지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진심을 계속 알려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무의미해 보이는 일들,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지속하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이 종들을 보내고 아들을 보낸 것처럼, 그런 일을 오랫동안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관점에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때문에 아무런 엄청난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통해 가장 위대한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은밀한 역사를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도 헛되게, 낭비되게 일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용서해줘도 사울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살려두면 사울이 계속 다윗을 괴롭힐 것인데,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베푼 용서가 자신의 고통을 지속시키는 것을 감수한 것입니다.

 

    다윗이 말을 마쳤을 때 사울은 그런 다윗의 감정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내 아버지여”(11절)라고 부른 것에 응하듯 “내 아들 다윗아”라고 부르고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최소한 사울 스스로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반응하고 울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울면서 자신의 잘못을 어느 정도는 인정했습니다. 17절을 보면 사울은 자기가 다윗을 학대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반성의 끝입니다. 17~19절 까지 나머지는 다윗이 자기를 선하게 대해주었다는 즉, 살려줘서 고맙다는 내용입니다. 특히 19절에서 사울은 원수를 만나면 그냥 보내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일인데,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자기를 살려준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고맙다고 일종의 축복을 하는데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하게 대해 주시길 원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선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축복의 말은 그저 감사의 표현이고 형식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울이 어떤 말을 덧붙입니까?(21절) 다윗 네가 왕이 될 것을 나도 아는데, 그 때가서 나의 가족들과 친족들을 해치지 말고 나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말아달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렇게 사울은 다윗이 자기에게 어떤 일들을 해주기를 요구하면서 자신은 어떤 약속도 다짐도 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눈물과 반성은 어떤 의미입니까? 사울이 흘린 눈물의 의미는 다윗이 은혜 베푼 것에 대한 감동이었고, 죽음이 자기 옆을 스쳐지나간 것으로 인한 전율과 긴장이 풀리면서 생긴 안도감이며,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자기 연민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울은 자기와 가문을 멸하지 않을 것까지 약속하라고 다윗에게 요구했습니다. 사울은 은혜를 이용합니다. 자기를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는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 연장시키신 목숨,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의 불안함을 드러내는 기회로,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확보하려는 기회로만 활용합니다. 이렇게 거짓 회심을 한 자는 은혜가 임할 때 절망과 돌이킴이 아닌 안도감만을 경험할 뿐입니다. 종교가 주는 자기 안심과 감정 정화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이 아닌 것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한계를 가진 신앙은 다윗처럼 하나님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지만 백 데나리온 빚 진자에게 모질게 굴었던 자와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울과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은혜를 어떻게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가 다윗처럼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려면, 가망 없는 자에게 낭비와 같은 은혜를 계속 베풀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그런 은혜를 입고 있는 사울과 같은 자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격 없고, 변할 가능성이 없는 사울에게 베풀어진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우리에게 항상 주어지고 있습니다. 쉽게 변하지 않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잘 변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울 때, 은혜를 중단하고 싶을 때 그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대답 없는 세상, 잘 변화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계속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가능성이 없는 절망스런 사울, 그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다윗이 존중하고 섬긴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 변하지 않는, 어리석고,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사울과 같은 이 세상과 사람들이 사실은 이전의 우리 자신이었고, 아직도 남아 있는 우리의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기대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에 두면서 은혜를 베풀었듯 우리도 우리의 용서와 배려가 그 사람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용서하고 섬기는 삶을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