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15-19:10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지가 기도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살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 없이 신앙행위를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인내하며 바른 기도로 기다리지 못하고, 그런 신앙으로 무엇인가 성취한다 해도 바리새인처럼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비유 속에서 겸손하게 자기 죄를 회개하며 은혜를 구한 세리를 인정하신 것에 이어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자들이 드러내는 태도와 반응을 보여줍니다.
본문 첫 부분에서 어떤 부모들이 자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마치 노키즈존에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사람들을 대하듯 제자들이 막았습니다. 옛날일수록 어린아이는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기 쉬웠는데 유대사회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가까이 불러들이셨고, 하나님 나라가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들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부자 관리가 예수님께 찾아온 이야기입니다. 그는 10장에서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한 것과 비슷한 것을 묻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 제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시다라는 대답으로 자기에 대한 칭찬을 거절하셨고, 십계명 후반부인 인간 사이에서의 죄들 즉 간음, 살인, 도둑질, 거짓, 부모공경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관리는 그런 것들을 이미 자기가 잘 지키고 있다고 대답했는데, 그것은 마치 기도하러 성전에 간 바리새인이 자기에 대해 만족스럽게 기도한 내용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자기 재산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본 후에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그 부자 관리는 근심했습니다.
세 번째는 앞의 상황을 지켜보던 예수님의 제자들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실 꿰는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시자 제자들은 이미 자기들이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면서 부자 관리와는 다른 자신들의 헌신을 드러냈습니다. 은근히 자신들의 가난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칭찬받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여러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과 복을 얻을 것이라고 제자들을 칭찬해주시는 듯했지만 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이 앞으로 당한 수치와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는 제자들이 그 당시에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합니다.
네 번째는 한 시각장애인, 맹인이 예수님께 치료받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눈이 안 보여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구걸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이 근처를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느 쪽에 계신지 볼 수 없었지만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이 자신에게 관심 가져주시길 바랐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그의 표현은 그저 예수님이 다윗 가문의 후손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이 바로 그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왕,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미합니다. 그 맹인은 그런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을 조용히 하라고, 입을 다물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 맹인은 포기하지 않고,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 사람을 가까이 부르셔서 그의 눈을 보게 해주셨고, 그가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눈 뜬 자는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다섯 번째는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세리, 세관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실 때 삭개오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키가 작아서 어려웠습니다. 그는 결국 돌무화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 당하는 그였기 때문에 나무 위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눈에 띄게 되는 것은 더욱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을 만한 행동이었지만 그는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부르셨고, 그의 집에 방문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가셨다고 수근거렸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집에 찾아오신 예수님께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자들은 세상 기준으로 자신을 차별화하면서 우월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 본문에 등장한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과 자기를 차별화하면서 우월함을 자랑하듯 기도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막은 것은 자기들에게만 차별화된 권리가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자 관리는 예수님이 십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자기는 이미 어려서부터 다 지키고 있다고 자랑하듯 말했습니다. 또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 때문에 이미 가난하다는 것으로 차별화된 우월감을 느끼는 듯했습니다(28절). 가난한 것이 세상에서는 자랑이 될 수는 없는데, 종교의 영역에서는 탁월한 것처럼 취급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우월함을 느끼는 요소는 그만큼 매우 교묘합니다. 때로는 ‘내가 저 사람보다 겸손해’라는 생각마저 차별과 교만을 만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우월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34절에서 말하는대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진짜 중요한 것,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죽음에 대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우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그런 제자들의 모습과는 반대로 놀라운 믿음으로 구원 얻은 맹인을 대조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 맹인은 자랑할 것도, 우쭐할 것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가난은 제자들처럼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자신의 육체적 문제에서 생겨난 또 다른 고통이고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차별하며 우습게 여기고 조용히 하라고 제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믿고 의지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오려는 어린아이를 제자들이 결국 막지 못했던 것처럼 예수님께 가까이 오려는(40절) 그 맹인을 아무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는 진정 살기 위해 단순하게 의지하는 어린아이처럼 예수님께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뜬 후 이전에 못 누린 삶을 살아보겠다고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다음으로 누가는 재산 나누는 것을 주저했던 부자 관리와 반대로 자기 재산의 상당 부분을 내놓은 부자 세리 삭개오를 대조하게 합니다. 사람들의 수근거림 속에서 드러났듯 삭개오는 미움받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믿음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 때문에 과감한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누가 봐도 죄인인 자신을 부르시고, 자기 집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아무 자격 없는 수치스런 죄인인 자신을 찾아주신 분이 누구이신지 믿게 되었고, 변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 가장 큰 만족과 기쁨을 누렸기에 재물을 아까워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자기에게 자랑할 것이 있고, 남들보다 우월한 것이 있다고 생각되면 주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어린 아이처럼 반가워하면서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 우리의 신앙생활마저 자기만족과 다른 사람들과 차별을 두기 위해 행한 것이라면 중요한 순간에 내가 쌓아 온 것들을 주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갈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처럼 오로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고, 의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집이나 가족이나 재산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그런 것들보다 가장 귀한 분임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 동안 추구한 세상 만족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즐거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런 가치관의 변화를 드러냅니다. 주님을 더 알기 원하고, 따르고, 섬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우선순위의 변화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무엇보다 즐거워하고 중요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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