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11-2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누가복음에서 저자 누가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신다는 것을 줄곧 강조해 왔습니다. 특별히 17장 부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워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중심도시, 수도였던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대한 하나님 나라가 이제 곧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는 이유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귀족 출신인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오려고 떠났습니다. 그 귀족 주인은 떠나기 전 자기 종 열 명에게 열 므나를 나눠주었습니다. 한 사람이 한 므나씩 받았는데, 한 므나는 당시 노동자의 3개월치 소득에 해당됩니다.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600~1000만원 정도 되는 금액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그 돈을 가지고 장사를 하라고 말하고 떠났습니다. 종들이 그런 임무를 받은 것과 달리 그 지역 주민들은 그 귀족이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싫어했고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귀족은 왕이 되어 돌아왔고, 종들을 불러 얼마나 남겼는지 확인했습니다.
첫 번째 종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즉 열 배를 남겼고, 두 번째 종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즉 다섯 배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어떤 종은 받았던 돈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천에 싸서 보관해 놓았습니다. 주인이 그 종에게 왜 그랬냐고 묻자 종은 주인이 지독하고 거친 분이라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기 때문에 무서워서 그랬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라 하더라도 너는 그 돈을 그냥 썩혀두지 말고 다른 사람이 사용하도록 빌려주기라도 했으면 이자라도 벌 수 있지 않았겠냐라고 말한 후 그 종이 가진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어서 주인은 자기가 왕 되는 것을 반대한 주민들을 무섭게 심판했습니다. 본문의 비유는 분명 주인의 종들과 주인을 반대하던 자들의 운명이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종들은 맡겨진 일에 대한 결과를 확인받았지만, 반대자들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한 므나를 그냥 둔 종의 최후가 어떤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 주인을 악하게 여겼습니다. 주인도 그를 악한 종이라고 불렀고, 가지고 있던 므나를 빼앗았다는 것을 볼 때 그가 주인의 왕 되는 것을 원하지 않던 자들과 같은 운명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비유를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11절이 말하듯 하나님 나라가 당장 이뤄질 것이라는 사람들의 오해 때문에 예수님이 사용하셨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비유 속 귀족 주인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지만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맡기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려 한 것은 수도를 장악해서 자신의 나라로 바꾸시려는 것이 아니라 죽으려고 가신 것입니다.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인 우리를 위해 죽으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 눈에 안 보이지만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이신지 충분하게 가르치시고 증거를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인 자기들의 구주이시고, 왕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저 현실 속 자기들 고통이나 해결해주고,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는 메시아이길 바랐습니다. 그들은 인생과 역사의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인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해결해주시는 구주를 기다리기보다 현실적인 문제만 가지고 예수님께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은 실망했고, 또 어떤 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가증스럽고 은밀한 죄들을 건드리시기 때문에 죽이려 했습니다. 비유 속 주민들이 귀족의 왕 되는 것을 반대한 것처럼 실제로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혁명을 일으키실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원했던 대로 죽으시려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다시 살아나시고, 마침내 심판하고 다스릴 왕으로 다시 오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 기다림의 과정에서 주님의 종들은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종들은 주님이 주신 인생의 시간과 자신의 모든 영적, 육적 자원을 가지고 주님이 기뻐하실 열매를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마치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기거나, 다섯 므나를 남긴 자들처럼 주인의 기쁨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한 므나를 그저 방치해둔 자처럼 살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자신에게 있는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님의 성품을 왜곡해서 핑계를 댑니다. 한 므나 받은 종이 주인에 대해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어떤 자들은 주께서 우리에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맡기셨다고 불평하거나 두려워합니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 예수 믿게 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변하지 않는 악한 세상에 어떻게 복음을 들고 나갈 수 있는지’라고 생각하면서 무력한 태도로 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원과 기회들을 그냥 묻어둡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주의 백성들이고, 종들인 우리는 주님이 다실 오실 때까지 그냥 수동적으로 버티면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비유 속 첫째, 둘째 종들처럼 맡겨진 일들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같은 불쌍한 죄인, 구원이 필요한 자들이 세상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구원자가 필요한 비참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살릴 생명의 복음을 반대하고, 복음 전하는 자들과 교회를 반대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탁하신 종들은 주님처럼 고난당하고, 죽기도 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실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못 내면 어찌하나, 다 잃으면 어찌하나 걱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주님이 기뻐하실 일들에 우리의 자원을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 물질, 시간들은 언젠가 다 사라집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잘 남겨둔다 해도,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썩어지고 사라질 것들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이런 헌신은 다른 성도들보다 많은 결과를 내려고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기든, 다섯 므나를 남기든, 겨우 이자 밖에 안 되는 것만 남기든 다시 돌아오실 주님을 사랑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그렇게 주님이 기뻐하실 일들,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일들을 위해 자원을 사용해야 합니다.
비유를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종들이 수고한 결과, 얼마나 남겼느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근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은혜로 구원받아 거저 누리게 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기계적으로 평등한 나라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수고하고, 충성한 만큼 하나님 나라에서 더 큰 기쁨과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비유에서처럼 상급이 다를 것입니다. 물론 그런 차이가 이 땅의 물질적 가치 기준과 다를 것이고, 구원 받은 자들 사이에서 비교와 차별로 경험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를 위해 더 많이 수고한 자들이 얻게 되는 영광 때문에 그렇지 못한 자들은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이 수고하고 고난당한 자들을 통해 주님이 드러나신 것을 함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이 땅에서 비교와 차별과 질투를 낳는 죄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들보다 차별화된 상을 얻기 위해서 더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사랑만큼 더 헌신하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는 천국에서 남들보다 우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자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를 남기든, 다 잃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주님이 드러나실 일을 위해, 주님께로 돌아올 자들을 위해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주의 종들은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상관없이, 지금 오시든 나중에 오시든 분명 다시 만날 주님이기에 주께서 기뻐하실 일을 인내하면서 감당하는 태도를 가지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께서 속히 오시지 않고 더디 오시는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그로 인해 계속되는 고난 때문에 주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충성하는 성도들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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