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누가복음 강해 (30) 누가복음 18:1-14

따뜻한 진리 2022. 2. 20. 23:44

누가복음 18:1-1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제자도가 무엇인지, 그 나라 백성의 믿음이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언제 완성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 그 나라에 들어갈 자들의 태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와 재판장 비유와 기도하러 성전에 온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로 그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첫 비유는 이렇습니다. 어떤 도시에 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2절이 말하듯 그가 하나님도 사람도 무시한다는 것은 공정한 판결을 내리지 않고, 뇌물이나 기대하는 불의한 재판장이었음을 예상하게 합니다. 같은 도시에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도움받을 곳이 없어서 이 재판장을 자주 찾아왔습니다. 재판장은 들은 체도 안 하고 무시했지만 그 뒤로도 계속 과부가 자주 찾아오자 귀찮고 괴로워서 어쩔 수 없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다는 것입니다. 재판장은 과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가 편하려는 이기적인 이유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인간도 그러는데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께는 자기 백성들이 부르짖을 때 듣고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 속 재판장은 우리를 잘 아시고, 작은 신음도 듣고 계시는 선하신 하나님과 대조하기 위한 인물이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하나님이 귀찮으실 정도로 계속 기도하면 응답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도인 우리가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사는 중에 많은 고난을 겪을 것이고,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도와주시지 않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지만 그런 시간이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성도들의 원한을 모두 해결해주시는, 원수를 갚으시는, 완전한 위로와 상을 주시는 때가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고, 그런 믿음이 기도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자신이 재림하실 때 그런 믿음을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입니다. 바리새인 한 명과 세리 한 명이 성전에 올라갔는데,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한 내용에 따르면 그의 삶이 잘못된 것은 없었습니다. 그는 죄를 멀리하려 했고,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좋게 여기신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멀찍이 떨어져 있던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자기를 높이는 자가 아니라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살핀 본문의 두 비유에는 기도라는 요소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비유에는 그 시작에서 예수님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시기 위해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또 과부의 끈질긴 간청은 기도의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비유 역시 등장인물들이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각각의 비유는 그저 인내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라는 내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각 비유 끝에 하나님은 속히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시고, 자기를 낮추는 자를 의롭게 여기시는 분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이해를 교훈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기도가 본문의 표면적인 주제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바른 기도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비유 속 재판관처럼 우리가 귀찮게 하고, 압력을 행사해야 부탁을 더 잘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도가 많은 시간 기도해야 하고, 오랫동안 인내하면서 기도해야 하지만 그런 끈질긴 노력을 투자한 만큼 내가 원하는 결과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열심히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우리가 원하는대로 기도응답을 안 하실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오셔서 모든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완전한 기쁨을 주실 때를 우리가 기다리도록, 오직 하나님 자신만을 간절히 의지하도록 아직 응답되지 않은 것들을 남겨두십니다.

 

    또 하나님은 비유 속 바리새인처럼 자기 공로를 자랑하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 속에서 만족하고, 자기보다 못한 자를 우습게 여기고, 그것으로 감사의 이유를 삼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을 뜻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사랑이시고, 겸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우습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찾으시고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이방종교들은 자기가 믿는 신들의 성품과 도덕성에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감히 그런 것들을 알고자 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신들을 그냥 두려워하고, 신을 달래고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냥 갖다 바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감추시는 부분이 있지만, 우리보고 하나님 자신에 대해 알라고 가르쳐주시고, 드러내시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그것이 가득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고, 사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든지, 기도를 하든지 어떤 신앙 행위를 하든지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시길래 내가 이런 행위를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 관심도 없는데, 과연 이런 행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는 할까?’ 물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잘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자신을 인격적으로 여기지 않는 자의 기도도, 구원받지 못할 자의 기도도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구원받았다면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관심 없이, 종교 행위만 열심히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비인격적인 존재로 취급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기 필요에 따라 나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하고, 나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나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다면 슬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대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께 진실한 관심을 기울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찾고, 하나님으로 인해 놀라고 기뻐하고, 하나님만으로 만족스러워하고 영광스러워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자신을 알리셨고, 기도라는 하나님과 긴밀해지는 방법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고,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나의 문제를 신속히 해결해주시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끝까지 신뢰할 수 있습니다. 고통 때문에 하루가 천년 같은 시간을 버텨야 하고, 욥처럼 자기 저주를 하게 되는 비참한 순간을 보낼지라도 결국에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 될 그때 주님이 나를 영원한 비참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속히 오셨구나’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8절). 우리의 기도는 살아있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말씀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우리에게 인격을 주신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시니 우리는 하나님께 사람에게 말하듯, 정상적인 문장을 갖춰 정직하게 기도하면 됩니다. 때로 진실한 정서에 따라 울부짖거나 탄원하면서 소리를 지를 수도 있지만 항상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격적인 어조로 기도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쥐고 흔드는 듯한 말투로 기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 없이 열심히, 많이 기도를 하는 자신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은 비유 속 바리새인처럼 기도를 통해 더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는 인격적인 지식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8절에서 말씀하신대로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물으신 것에 해당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살아계신 분이시고, 변치 않는 사랑이시고, 선과 악의 기준이 되시는 분이시고, 완전한 지혜와 능력이심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준에 비참하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현실들도 궁극적으로 선을 위해 사용하고 계심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모든 죄와 고통을 끝내시고, 자신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피조물인 우리를 사랑하시려고 창조하셨고, 택하신 자들을 영원히 책임지심으로 자기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 깊이 알아가십시오. 그럴 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고,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 상황이 달라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무엇을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아도 그저 세리처럼 자격 없고 불쌍한 죄인인 나를 더 깊이 발견하면서 이미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전부를 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성도가 주님을 바른 태도로 기다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이 하나님 나라 가운데 이미 있는 들어와 있는 자들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