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누가복음 강해 (34) 누가복음 20:19-21:4

따뜻한 진리 2022. 3. 20. 22:07

누가복음 20:19-21: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지난 시간에는 성전의 주인이시고, 성전 자체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살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제외한 채로, 하나님을 없애고 자신들의 세상을 누리려 합니다. 예수님이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로 그것을 비판하시자 종교지도자들은 그 의미를 알아듣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려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을 존경하고, 배우고자 하는 목적으로 찾아온 것처럼 속이고 예수님께 질문한 다음 예수님이 대답하신 것을 꼬투리 잡아 위험한 인물로 만들어 죽이려 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자기에게 찾아온 그들의 정체와 의도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를 물었습니다. 로마는 데나리온이라는 은화로 세금을 받았습니다. 그 데나리온 동전의 앞면에는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글자로 "디베료 가이사 아구스도, 신성한 아들, 대제사장”이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격한 유대인들은 황제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우상숭배로 간주했기 때문에 동전 사용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금납부에 찬성한다고 대답하시면 우상숭배에 민감한 사람들과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는 열심당원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시고, 만약 세금납부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로마에 불복종한 자로 로마에 넘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시든 함정에 빠질만한 질문을 대리자들을 통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질문한 자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보여달라고 하셨고, 그들은 자기 동전을 내놓아 보였습니다. 그들이 로마의 동전을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먹고 살기 위해 로마의 경제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동전을 사용하는 자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의 것은 로마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던 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동전이 한쪽 면에 새겨진 지도자의 얼굴을 통해 누구에게 충성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인격체로서 하나님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나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 역시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계대결혼, 또는 형사수취혼이라 불리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혼한 남자가 죽으면 그의 아내를 남편의 형제 중 하나가 아내로 맞아들여서 죽은 형제의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게 해주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일곱 형제 사이에서 일어난 계대결혼을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형제 일곱 중 하나가 결혼을 했는데 그가 죽자 그 형수를 다음 형제가 아내로 받아들였는데, 두 번째 남편이 된 형제도 죽고, 차례로 일곱 번째도 죽고, 나중에 이 여자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들이 다 부활하면 이 여자가 누구의 남편이 되느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을 주장하셨던 예수님과 함께 부활을 조롱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방법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남녀가 결혼하는 일도 없고, 가족을 이루는 일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또 예수님은 모세가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내용은 그들의 인생에서 당장 이뤄지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언약은 이스라엘의 긴 역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죽어서 없다면, 부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은 언약도 유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그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약속하신 것을 이루셨음을 그들에게 확인시켜주시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죽은 후 부활해서 하나님 앞에서 서게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부활,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던 자들이 아무 말도 못하자 예수님은 질문 하나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영광스러웠던 때가 다윗이 왕이던 시절이었기에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을 그때처럼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처럼 전쟁으로 이스라엘을 부흥시키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그 후손이지만 다윗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편 110편에서 다윗이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라는 음성을 들은 것은 인용하시면서 질문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주께서 내 주께’라고 말한 것은 두 주인을 환상 중에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부가 성자께 말씀하신 것을 다윗이 들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보다 높으신, 자기를 있게 하신 주인이 자기 후손으로 태어나실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은 다윗보다 위대한 일을 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로마를 무찌르러 오신 분이 아니라 더 근본적이고, 어떤 미래의 인간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러 오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종교적인 명분으로 과부를 착취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을 헌금으로 드린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척 했지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았고, 전적으로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림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바르게 관리하고 성전을 통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를 잇는 역할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것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로마 정권 아래서 생존하기 위해 로마 동전을 사용하고 있었으면서 우상숭배와 애국심을 빌미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또 성경을 통해 부활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있다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또 그들은 다윗이 말한 주를 알고는 있었지만 예수님이 그 주님이심을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과 종교적 지식들로 자기를 섬겼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46, 47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듯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적 지식을 가지고 자기들을 자랑하고 과부와 같은 가난한 자들을 이용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오랜 지식과 경험을 쌓아온 전문가들은 그 분야에서 권위와 힘과 재력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수준이 되면 자신이 밟아온 과정과 경험에 갇히게 되고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끼리 그 직업의 권력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사회를 장악하려는 일을 흔히 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특별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여전히 돕고 살려내긴 하지만 이익과 권력을 확장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료인들과 법조인들이 정치력까지 장악하는 것을 계속 보고 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해온 우리들도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성경에 대해 교회에 대해 나름 전문가가 되지만 예수님을 거의 알지는 못하고 사람들을 섬기기보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만 하기 쉽습니다. 교회가 규모를 갖게 되면 장로나 직분자들이 그렇게 되곤 하고, 목사들도 그렇게 교회를 이용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납니다. 자기가 인정받고 이익을 누리기 위해 성경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교회를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신앙 경험과 성경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보고, 예수님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고, 예수님께 순종하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일들에 사용되고 있는지를 항상 물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가장 분명하고 온전히 아신 그분이 자기를 추구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부인하시고, 사랑을 나타내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