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아브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롭다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고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들처럼 많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때 비로소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믿음은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8절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말합니다. 여기 6절에서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을 말하는 이유는 이어 등장한 언약, 쪼개진 동물 사이를 지나시면서 아브람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겠다고 맹세하신 내용이 아브람의 잘남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입니다. 쪼갠 동물 사이를 지나시는 언약 맹세행위로 하나님은 십자가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백성과 나라를 이루시겠다고 예고하신 것인데 이것은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잘 싸웠거나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쳤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 편에서 자랑할 것이 없는 믿음을 하나님이 좋게 여기신 것입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이렇게 아브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 받은 것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유대인들은 출신이나 할례나 정결 예법이 구원을 확실하게 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는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으신 언약의 성격을 확인시킵니다. 아브람이 할례를 행하기 전, 이삭을 바치기 전, 어떤 충성을 하기 전 하나님은 아브람이 믿은 것을 좋게 여기셔서 의롭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쪼개진 동물 사이를 지나시면서 맹세하신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 작정이 변하거나 잊히거나 취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실하고 단호하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은 참된 믿음으로 인해 확고해집니다. 사람이 어떤 행위를 더하기 전에 우리 안의 믿음을 보시고 약속하신 것을 완전하게 보장하십니다. 그것이 이신칭의입니다.
아브람이 믿을 때 쪼개진 짐승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확인된 것처럼, 우리가 믿을 때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님이 완전한 보증이 되시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이 약속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십자가가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쪼개진 동물들보다 아들의 십자가가 더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의 어떤 행실이나 조건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는 근거가 아니라 보잘것 없는 믿음을 중요하게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칭송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출신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거나 율법과 도덕을 자랑하면서 남들에게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할 수 없습니다. 선한 삶,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거룩하고 성실한 삶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에게 뒤따라 오는 것이지 구원받기 위해 행위를 강제하거나 조건으로 제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보증으로 충분하게 여기는 믿음을 쉽게 얻지 못합니다. 자기가 구원 받을 만하다는 믿을만한 증거를 자기 공로에서 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확신을 자기가 만들어내려 합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적 행위나 선행이나 남다른 무엇인가를 행해서 안심하려 애씁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점을 파고들어서 믿음으로는 부족하다고, 할례도 행하고, 이것 저것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 무시하고 사람의 행위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구원의 완성이 사람의 행위에 달렸다고 주장합니다. 처음 믿음이 드러날 때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가봐야 구원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게 합니다. 그 불안감으로 선행을 하게 합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서 확신을 얻으려는 거짓 믿음을 가진 자는 율법주의라는 짐을 지게 됩니다. 어떤 자는 그 짐을 지고 가는 자기가 좀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구원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안심할 수도 있지만 어떤 자들은 그 짐의 무거움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성경이 분명 복음이 주는 자유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쉼을 얻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믿음으로 확신을 얻고 자유를 얻으면 좋겠지만 상당수가 무율법주의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무율법주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가 다 해결되었으니 믿은 후에 회개할 필요도 없고, 모든 도덕적 판단에서 자유로워져서 원하는대로 살아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설명은 마치 복음의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 같지만 거짓입니다. 이런 율법주의나 무율법주의 때문에 바울이 우리 구원의 확실함, 견고함이 사람의 행실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렸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변질시키는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 말고도 성경이 말하는 믿음, 아브람을 통해서 드러난 믿음을 왜곡시키는 잘못된 이해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어드렸으니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지요.‘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잘 믿은 만큼 그것이 공로가 되어 내 소원이 이뤄지겠지 생각하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바른 믿음이 생기기까지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자기 욕구의 수준으로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을 사용하실 수도 있고 우리가 효과를 볼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는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의롭다고 여기시지 않습니다.
또 무엇이든 기도했으니 의심하지 않으면 무조건 이뤄질 거라고 자기 암시,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것, ‘할 수 있다. 믿음만이 능력이다.’라고 외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또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의지적으로 결단하기만 하면 구원이 보장된다고 이해하는 것도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로마서 10장 9절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이라는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한 산데마니안주의라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예수 믿는다고 영접기도 하는 것을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에 대한 그런 잘못된 이해들은 인간 자신이 주체가 되어있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작용하는 참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믿는 자의 탁월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상의 탁월함을 드러냅니다. 어떤 도구가 안전하고 쓸모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경험하면 그 도구를 내가 잘 사용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우리 안에서 저절로 생겨납니다. 안전하지 않고, 쓸모도 없는 도구를 내가 믿는다고 해서 좋은 도구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믿는 대상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직한 사람을 알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믿음도 당연히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하시려는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이 믿을만한 분이심을 알리십니다. 복음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물론 믿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다 믿게 하시니 운명론자처럼 수동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게 된 자는 그 믿음을 활용해서 자기 안에서 확신을 더 키워나가고 그 확신이 주는 기쁨과 위로를 얻으려고 능동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음직스럽게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가 믿도록 만드시는 하나님께 공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믿음이라는 수단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다고 여기시는 이유는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 자녀 삼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그냥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믿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으로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셔서 자신의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참되게 믿는 자는 믿음을 통해 더욱 겸손해지고,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는 믿음으로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삽니다. 거짓된 믿음은 믿는 자신을 자랑하게 만들지만 참된 믿음은 그 믿음을 주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게 하신 탁월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옳은 일은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높이는 일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시고, 좋다고, 옳다고 여기신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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