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27) 창세기 16:1-16

따뜻한 진리 2022. 11. 6. 21:55

창세기 16:1-1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아브람은 자녀를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눈에 보이는 진전이 없자 자기 종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으려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별을 보이시면서 다시 한번 약속을 상기시키시고, 쪼갠 동물 사이를 지나시면서 엄숙한 맹세를 하시자 아브람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아내 사래는 다른 방법을 모색합니다. 사래는 자기 여종 하갈을 통해 남편 아브람의 아이를 낳으려 했습니다. 본처가 아이를 낳지 못할 때 종이나 첩을 통해 아이를 낳는 것은 당시 관습이었고, 과거 우리 나라에서도 있었던 일입니다. 2절을 보면 이런 일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사래는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아브람은 수동적으로 따른 것으로 묘사합니다.

 

    뱃속에 아브람의 아이를 갖게 된 하갈은 자기 주인 사래를 무시하고 깔봤습니다. 사래는 아브람한테 당신 때문에 내가 모욕을 당하고 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사래한테 하갈이 여전히 당신 종이니 알아서 하라고 말합니다. 결국 사래가 하갈을 학대했고 하갈은 임신한 몸으로 도망칩니다. 광야의 샘 근처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때 하갈은 자손이 셀 수 없이 많아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데, 이는 아브람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과 비슷합니다. 하갈이 종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 안에서 하갈도 복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얻을 많은 후손처럼 하갈도 자기 아이를 통해 많은 후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이 주인 사래에게 돌아가서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하갈은 아브람과 사래에게 가서 아이를 낳고 이스마엘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구원할 수 없고 약속된 구원자를 낳을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정 자신과 자기 후손들을 위한 일을 할 줄 모릅니다. 지금 하는 일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스스로 자멸하는 길을 갑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 태어난 첫아들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동생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가인을 닮아서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는 길로 갔습니다. 그들이 가진 악한 태도와 획득한 기술은 스스로 멸망을 초래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악인들의 번성을 잠시 단절시키고 얼마 남지 않은 의로운 자들마저 전멸되는 것을 막으시려고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심판과 구원을 함께 이루셨습니다. 그냥 두면 인간은 이미 멸망했을 것인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약속된 구원자가 오시기까지, 또 약속된 백성들이 모두 구원 얻기까지 인류가 자멸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구원의 대책이 하나님께만 있고, 그 대책이 다 이뤄지기까지 인류가 버틸 능력도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후손의 첫 열매 이삭이 아브람과 사래의 자연적인 출산능력으로 태어나지 않게 않으셨습니다. 아브람과 사래 둘 다 결코 아이를 낳을 수 없을 때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그 후손은 단지 아브람이 낳은 자녀들이 대를 이어 자꾸 늘어나서 많아진 이스라엘만 가리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고, 또한 그분을 구주로 믿는 구원받는 백성들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생명이 태어나는 것도 기적이지만 죄인이 구원받는 영적 출생은 더 기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인들 가운데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시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가 아이를 절대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주시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후손과 그 후손들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나타내시려 한 것입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대로 한 동기를 긍정적으로 봐야 할까요. 부정적으로 봐야할까요? 하갈이라는 인간적인 방법, 대리모라는 방법이 어떻게든 약속된 후손을 만들려는 믿음의 적용인지, 아니면 믿음이 흔들려서 기다리지 못한 것인지 우리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나게 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믿고 순종해야 할 그 내용이 아내 하와의 마음에 분명하게 심겨지지 않았습니다. 또 아담은 선악과를 가져온 아내 하와를 잘 다스려 경계하지 않고 그냥 무책임하게 받아 먹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아브람은 하나님이 주신 후손 언약에 대한 태도를 사래에게 제대로 형성시키지 못했습니다. 아담처럼 아브람은 아내의 인간적인 제안에 그냥 따랐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가 서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서로 떠넘긴 것처럼 아브람과 사래도 서로에게 책임으로 떠넘깁니다.

 

    우리는 하갈이라는 대리모를 통해 아브람의 아이를 낳으려 한 사래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그냥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방법을 모색하고, 모험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사래와 하갈 사이, 사래와 아브람 사이에 갈등을 만들었습니다. 또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은 이슬람인들의 조상이 되어 이삭의 후손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십자군 전쟁처럼 이슬람 세력은 중동과 서양에서의 전쟁을 비롯해 현재까지도 전세계적인 불안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12-13절에서 하나님은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1절이 말하듯 하갈은 아브람이 이집트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 때문에 바로에게서 얻은 선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아브람의 잘못에 대해 침묵하시고, 그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도우셨지만 아브람의 잘못이 시간이 흘러 고통을 유발했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아브람의 그 잘못은 그 자신과 후손들에게 지금까지 고통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언약 백성들이라고 해서 어떤 죄도 안 짓고, 하나님 나라를 보기 좋게 이 땅에 세우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약 백성들이 단기적으로는 세상 사람들보다는 선하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지만 여전히 실수하고 하나님께서 수습하셔야 하는 문제들을 일으키곤 합니다. 한 순간의 믿음 없음이나, 하나님의 뜻대로 잘 해보겠다는 열정에 의해서나, 자기 죄성에 의해서나 하나님의 백성도 문제를 일으킬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중요한 언약 상대자들은 치명적인 실수들을 드러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마치 자기 아들이 저지른 문제를 해결하고자 뛰어다니고 일어난 피해를 수습하고 보상하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열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들의 잘못에 징계도 하셨지만 부끄러움을 덮으시고, 원래 약속하셨던 것을 성실하게 변함없이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을 함부로 비판하고, 그것을 기회 삼아 악을 행하는 주변인들을 처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잘못으로 고생하게 된 약자 하갈을 위로하시고, 보호하시며 다시 아브람의 다스림 안에 복종하게 하셔서 아브람이 누릴 약속을 함께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스스로 이루실테니 나는 그냥 수동적으로 계속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본문의 사래와 아브람처럼 사람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의 문제 말입니다. 물론 우리 일상 속 대부분의 결정은 아브람이 약속된 후손을 얻는 일과 같은 중대한 내용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아브람에게 주신 후손에 대한 약속과 같은 엄청난 것을 어떤 개인에게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중대한 언약이 예수님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인이 아닌 교회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려 할 때 주로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나름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위해, 주님이 오실 때를 앞당기기 위해 헌신, 충성하겠다고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고, 선교지도 개척했는데 그것이 원주민 학살, 제국주의 확장의 도구라는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한다 할지라도 복음을 부끄럽게 만들고, 걸림돌이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서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역은 늘 미련하게도 보이고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아브람의 잘못을 허용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부족함을 허용하셔서 그것을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