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29) 창세기 17:15-18:15

따뜻한 진리 2022. 11. 20. 19:27

창세기 17:15-18:1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하나님이 구십구 세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름을 바꿔주시고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세 방문자가 아브라함에게 찾아왔습니다. 2절을 보면 세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어떤 해석자는 세 방문자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두 천사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아브람이 준비한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분명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절에서 아브라함은 ‘내 주여’라고 그들을 불렀고, 13절에서는 ‘여호와께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방문자들을 복수로 ‘그들’이라고 불렀다가, 단수로 ‘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 같은 신비한 방문자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방문자들이 충분히 먹고, 잘 쉴 수 있도록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는데, 그것은 정말 사라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장막 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는 사라를 놀라게 하고 앞으로 할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여호와께서 1년 후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자기 남편은 늙었고, 자신도 늙어 생리가 끝난 폐경 상태라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사라가 말한 것과 웃은 것을 자신이 다 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라는 자기가 웃지 않았다고 부인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눈앞에 없는 사라의 생각과 반응을 다 알고 계심을 나타내셨고, 또 자신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낳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라만 웃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주 본문 17장 17절을 보면 아브라함도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엎드려 웃었다고 합니다. 그 웃음은 기다리던 바가 드디어 이뤄질 것에 기뻐하는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사라가 웃은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거나 후손에 대해 약속하신 것을 허황된 것으로 무시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식 능력이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살던 때가 지금처럼 과학이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나름 과학적이었습니다. 그들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남녀의 신체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기준에 따라 그들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웃었습니다. 그러나 14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못 하실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두고 웃었듯이 사람들은 능력이 많아질수록 과학이 발전할수록 하나님을 향해 웃습니다. 어떻게 방주에 세상 동물들이 다 탈 수 있었겠냐고 비웃습니다. 출애굽 때 홍해가 갈라진 것이 아니라 수위가 낮은 쪽으로 건넜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처녀 마리아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었냐고,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것은 없다고, 예수님처럼 사람이 물 위를 걷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비웃던 일을 스스로 하고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죽었을 병들을 고치고, 하늘을 날고, 인공으로 비를 내리고, 남편 없는 여자가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고, 유전자 편집 기술로 영생을 꿈꾸고 있습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라고, 비과학적이니 믿을 수 없다고 웃어넘기려 한 일들을 인간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결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100세의 아브라함과 90세의 사라가 아이를 낳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여호와께서 못하실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삭의 뜻은 웃음입니다. 그 이름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자신들이 웃은 것을 두고두고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이름이었습니다. 또 믿지 못했던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이 아들을 선물로 주신 것에 항상 놀라게 할 이름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불임의 여인이 아이를 낳게 된 사건들이 여러 번 있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 야곱의 아내 라헬, 엘가나의 아내 한나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처럼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시거나 천사가 와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경우는 사사시대의 삼손의 출생과 세례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출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인간적으로 결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아이를 낳게 된 사건은 이후에 있을 유사한 사건들의 전주곡이었고, 예수님의 출생을 전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나이가 많아 결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노년의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이삭을 주셨고, 아직 결혼하지 않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처녀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극단적인 두 경우를 통해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창조주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은 일생 중 아기 때 가장 많이 웃는 것 같습니다. 웃는 아기를 보고 엄마 아빠도 웃습니다. 어른이 되면 웃을 일, 기뻐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돈과 권력이 아무리 많은 사람도 진심으로 기뻐할 일이 없으니 마약이나 쾌락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벌이나 정치인들의 얼굴은 기쁨이 쌓인 표정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기심과 간사함에 익숙하다는 듯한 표정의 얼굴로 변해갑니다. 인간이 스스로 잘난 줄 알고 활개 치는 이 세상은 웃을 일이 없습니다. 멸망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참으로 웃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을 아들로 주셔서 아브라함과 사라로 하여금 '아... 내가 하나님의 약속 앞에 웃었었지'라고 이삭을 볼 때마다 항상 기억하면서 반성하고, 동시에 이삭을 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웃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마1:21) 의미의 예수라는 아들을 주셔서 우리가 무엇을 해도 진정 기쁘지 않고 이 세상이 괴롭고 근심 많은 이유가 우리의 죄 때문임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이 죄에서 구원할 자가 필요하구나'라고 깨닫게 하시고, 구원자를 믿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웃을 수 있는 참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 그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세상 어떤 이름보다 귀하고, 능력 있는 이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 모두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웃을 수 있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