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35) 창세기 22:1-19 (1)

따뜻한 진리 2023. 1. 1. 20:23

창세기 22:1-19 (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번제에 사용할 나무 장작을 나귀에 싣고, 종 두 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출발했습니다. 삼일이 걸려 모리아 땅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은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아들 이삭에게 지게 하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들고 함께 번제 장소로 갔습니다. 이삭이 번제 할 양은 어디 있냐고 묻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모호한 대답은 이삭이 제물이 된다는 슬픈 사실을 숨긴 것인 동시에 아브라함이 순종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이삭의 죽음을 막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는 표현이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이삭을 묶어 번제단 위에 올리고 칼로 찌르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을 막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변에 숫양이 있는 것을 발견했고, 이삭 대신 그 양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고, 또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에 대한 복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이삭 둘 다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아브라함에 대해 살피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구원받은 자의 믿음이 순종과 헌신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등장이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반응한 일이었듯, 인생의 정점인 본문의 사건에서도 그는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12장에서 그가 고향과 하란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갔다면 본문에서는 아비멜렉이 허락해준 블레셋 땅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 땅으로 갔습니다. 또 그 시작이 친척과 어버지를 떠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며 자기 생존 본능을 드러냈지만, 이제는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을 내놓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에서 19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많은 후손들을 주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을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삭을 살리실 것이라고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고 죽은 이삭이 부활할 것을 믿었다 해도,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명령은 자식을 제물로 요구하던 당시 이방신들 보다 하나님이 나을 것이 없는 분이라고 실망하게 만들고, 그런 요구를 한 음성이 진짜 하나님이 맞는지 의심할 만한 일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분명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으로 확신했고, 하나님의 성품이나 도덕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그런 요구와 자신의 순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행동했습니다.

 

    다음으로 야고보서 2장 21-22절은 아브라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여기서 야고보는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구원자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 경고하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행위를 드러낸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참되다면 하나님이 인정하실만한 행위를 드러낸다는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믿음은 그저 말로 끝나거나 동의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이 말하듯 하나님은 아브람이 믿은 것을 의로 여기셨지만, 본문에서는 믿음에서 말미암는 행함도 기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의롭게 하신 자의 믿음이 열매 맺도록 개입하시고 인생을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하신 자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생명 있는 믿음임을 보이도록 성장시키십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2절에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라고, 16절에서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이라고, 18절에서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의 행위를 흡족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행함, 헌신, 충성을 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반응하고 표현하고, 헌신하길 원하십니다. 말뿐인 믿음은 자기 보호와 자기 욕심에서 나온 자기 속임이고 착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실한 믿음은 우리가 믿음을 근거로 하나님께 복 받고 안전을 보장받겠다고 기대하는 것을 넘어 섭니다. 참 믿음은 자기 생존의 이기심을 넘어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을 가지고 행한 실천이나 헌신은 그것을 행한 사람을 자랑스럽게 하거나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애초부터 참된 믿음을 가지고 행한 자는 믿음 있는 자신을 자랑하거나 보상을 바라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만족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른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대속자, 중보자만이 참 위로와 만족이 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숫양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이 보기에 위대한 믿음으로 헌신했지만 자기 믿음과 헌신의 위대함에 만족하고, 성취감을 맛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번제는 이삭으로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숫양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숫양으로 번제를 드려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고, 자신도 아들을 다시 얻은 만족과 위로를 얻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고, 순종했지만 그를 만족시킨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대속물이었습니다. 우리의 어떤 실천, 헌신, 충성도 그 자체로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대단한 순종이라도 실제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속물,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선한 삶과 헌신이 하나님께서 받아주실만한 것이 됩니다. 우리 자신을 자랑할 것은 없고,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헌신과 충성 속에서도 겸손하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시고, 기적적으로 이삭을 주신 이유는 단지 아브라함의 가정에 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와 동행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진짜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복을 보장받기 위해, 단지 하나님을 자식과 땅을 주시는 분 정도로 여겼다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어렵게 얻은 이삭을 다시 죽이라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그의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소원을 이루는데 사용하기보다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뜻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게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런 일에 믿음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시려는 계획을 모형으로 이 땅 가운데 나타나시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브라함을 통해 역사 속에 전달되었습니다. 믿음은 그렇게 우리의 바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려는 뜻에 순종하고 따라가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양으로도 불렀던 미가서 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이삭에게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대한 집착에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애착과 경외심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