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3:1-20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이 죽음 직전까지 간 것에 이어 아내 사라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은 몸을 매장할 땅이 필요했습니다. 사라가 헤브론에서 죽었기에 아브람은 그 땅의 헷 족속을 만나 땅을 얻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헷 족속 사람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지도자라고 높이며 기꺼이 사라를 매장할 장소를 제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좋은 묘실, 빈 무덤이 많으니 아브라함에게 그중 좋은 것을 선택해서 사용하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이방인, 거류민은 일반적으로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묘실, 즉 좋은 무덤이 될 동굴 매장지를 그냥 이용하라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저 묘실을 빌려 쓰는 것이 아니라 넓은 땅을 구입하겠다고 아주 정중하게 부탁합니다. 그러자 그 땅 주인인 에브론은 땅과 동굴까지 아브라함에게 그냥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땅값으로 은 사백 세겔을 지불하고 막벨라 굴이 있는 마므레 평지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사라를 묻습니다.
그때까지 아브라함은 이동하면서 살았고, 아비멜렉 왕이 허락해준 브엘세바 땅 역시 머물 수 있는 거주지였을 뿐 아브라함의 소유는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가진 땅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은 하나님께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후손에 대한 약속은 오랜 기다림 속에서 이삭을 통해 이제 막 이뤄지기 시작했지만, 땅에 대한 약속은 이뤄지지 못한 채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죽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자 비로소 땅을 구입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 중 가장 안정되어야 할 시점, 가장 행복을 누려야 할 시점을 앞두고 자기 소유의 거처를 구하고자 하는데, 아브라함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땅을 구입했습니다. 그가 그때 되어서야 돈이 모아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상당한 재력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그동안 계속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은 헤브론 지역의 마므레 평지를 샀을까요? 13장으로 가보면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따로 살기로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게 하신 후 그 땅을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구체적으로 하셨고, 그때 아브라함은 헤브론 땅 마므레 평지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예배했던 그 땅을 산 것은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죽더라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분명히 이루시는 분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리 대단하면 뭐해, 내가 살아있을 때 이뤄져서 내가 누려야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 약속을 이루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 내가 죽은 이후 태어날 내가 알지 못하는 후손들이 그 땅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소망한 것입니다.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시면서 언약을 맺으실 때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 이후 어느 후손에 가서 종살이가 시작되어 400년 후에 약속의 땅에 돌아올지 몰랐습니다. 또 그 긴 시간 동안 그 땅의 소유가 어떻게 될지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금을 들여 구입한 그 땅이 후손들의 땅이 될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신뢰하는 믿음 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 땅을 사두면 언젠가는 값이 올라서 내 자녀들이 이득을 보겠지라는 생각으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고 그 땅을 확보한 것입니다. 우리가 땅과 부동산을 사면 팔지 않는 이상 영원히 내 소유, 내 후손들의 소유가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진이 나고, 바닷물이 넘치고, 전쟁이 나고, 통치체제가 바뀌면 내 땅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역사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가 이제 와서 땅을 산 것은 인간적으로 그 땅의 소유가 얼마나 오랫동안 보존될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항상 살아계셔서 약속하신 땅을 후손들을 통해 이뤄주실 것을 믿고 바란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사람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을 먼저 준비하신 후 사람을 창조하신 것처럼 몸을 가진 우리에겐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 공간, 땅이라는 선물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만 땅에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다루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동산 그 땅에서 내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동생을 죽인 가인이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자가 되게 하셨고, 노아 때 패역한 자들을 땅에서 쓸어버리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자신이 지시하신 땅을 향해 가게 하셨고, 그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대로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서 풍성한 복을 누리게 하셨지만 우상숭배와 불순종이 계속되자 하나님은 그 땅에서 이스라엘을 쫒아내셨습니다. 오랜 포로생활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무시한 가인의 후예들이나, 가나안의 이방 족속들이 땅을 차지하며 살았고, 후손들을 많이 낳아 막강한 세력을 이뤘지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유랑하고, 자녀도 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가르치시고, 믿음을 갖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살 거처를 얻고, 후손을 많이 얻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의미가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우리의 거처, 터전, 안식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유전자를 전달해주고, 나를 기억해줄 자녀와 후손보다 나를 영원히 기억해주시고, 영원히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 중요하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 성도들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족들을 비롯한 사랑하는 자들이 성도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나안 땅을 되찾는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약속 받은 땅의 회복, 다윗이 다스렸던 영토의 회복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자 그 나라 왕인 자신에게로 집중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시고,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차지할 것을 지시하신 것은 단순히 이 지구상의 가나안 땅이라는 특정 지역을 차지하면서 거기서 영원히 살라고 계획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모형이었습니다. 사람이 생명을 얻기 위해 들어가야 할 그곳을 노아 시대에는 방주로,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것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땅, 영원한 안식의 종착지는 바로 예수님을 가리켰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참 후손 역시 예수님이셨습니다. 이 세상의 땅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모형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가족의 매장을 위해 헤브론 마므레 평지를 구입한 것처럼 우리도 현실의 필요를 위해 땅을 사고,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헤브론 땅을 구입한 것이 하나님이 주실 영원한 거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병들었든, 늙었든, 생식능력이 어떠하든 약속의 자녀를 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뿐이듯, 땅이 뒤집히고 전쟁이 일어나고 세상이 망해도 약속된 거처를 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아브라함이 믿은 것입니다. 자기 후손들이 이집트 노예생활을 하고, 구입한 헤브론 땅과 막벨라 굴의 소유권을 기억해 줄 사람과 증거물들이 사라진다 해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주실 것을 아브라함이 믿었기에 그 땅에 가족과 함께 묻히기로 한 것입니다. 후손들과 함께 그 땅에서 만나고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만나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하고 또 그런 믿음을 전달하기 위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무엇인지 그 흔적들을 남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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