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33) 창세기 21:1-21

따뜻한 진리 2022. 12. 18. 19:43

창세기 21:1-2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삭이 드디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출생으로 인해 축하하고 좋아할 일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삭의 출생을 먼저 사라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태어날 이삭에 대해 여러 차례 약속을 주셨는데, 나중으로 갈수록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12:2), 다음에는 아브라함의 종이 아닌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고(13:4), 그 다음에는 여종이 아닌 사라를 통해 이삭을 주시겠다고(18:10) 약속하시면서 이삭의 출생을 믿고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정작 이삭이 태어난 장면에 대해서 매우 간략하게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를 두 번 반복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었을 때 낳았다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은 약속대로 정확하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냐고 당연하다는 듯 언급하고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삭의 출생 자체보다는 그로 인해 일어난 다른 일들에 우리가 관심을 갖게 합니다. 그것은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기다리지 못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과거를 부끄럽게 합니다. 특히 이어서 묘사하는 사라의 행동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보도록 만듭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행하심과 사라의 행위를 주로 말합니다. 사라는 특별히 웃음이라는 단어와 연관해서 말하고 행동합니다. 6절을 보면 사라는 하나님이 자기를 웃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1년 전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 사라는 믿지 못해서 웃었는데, 이제는 좋아서 웃습니다. 사라는 이삭의 출생 소식에 다른 사람들도 웃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라의 웃음과 기쁨은 누가복음 1장에서 아기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한 것과는 다른 태도입니다. 이어서 사라는 이삭이 젖을 뗄 때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놀리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웃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를 쫓아내라고, 추방하라고 남편 아브라함에게 압력을 행사합니다. 사라는 앞에서 임신한 하갈이 자신을 우습게 여길 때 광야로 쫓아낸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아브라함을 압박해 하갈과 동침시켜 이스마엘을 낳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이삭을 낳자 자신이 이용했던 하갈 모자를 내쫓은 것입니다. 이런 관점이 지나치게 사라를 나쁘게 보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사라가 이스마엘 모자를 내보낸 것은 인간적인 생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후손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스마엘을 경계하고 쫓아낸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9장과 이삭을 약속의 자녀로, 이스마엘을 육신의 자녀로 대비시키고 있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은 것을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사라가 잘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9장은 사람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고 있고, 갈라디아서 4장은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기 위해 이삭과 이스마엘을 비유로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라가 바울이 이해한 대로, 하나님이 이삭에게 부여하신 언약적이고 복음적 의미를 지키기 위해 이스마엘을 보낸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라는 그저 인간적인 부모 입장에서 이삭을 위해 행동한 것입니다. 유산을 이삭에게만 물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양심에 거리끼는 악한 일임을 알았기에 남편의 권위를 이용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런 사라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에 11절에서 매우 근심한 것입니다. 그냥 광야로 내보냈다가는 이스마엘 모자가 죽을 수도 있고, 앞날이 고생일 것을 아브라함은 걱정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아셨기에 아브라함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그냥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걱정을 달래시려고 이스마엘도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냈지만 하나님은 그 쫓겨난 모자를 보호하시고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의도를 허용하셨지만 사라가 기대한대로 이스마엘을 복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이삭만큼이나 이스마엘에게도 일반은총을 보장하셨습니다.

 

    사라는 약속을 비웃고,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방법을 사용했다가 이제 와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로 저지른 일들의 흔적을 손쉽게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방해물인 이스마엘 모자를 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고 은혜를 경험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야 하고, 자기 짐을 지고 가야 하는데 사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라가 그렇게 아들 이삭을 인간적으로 보호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위기에 처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이삭이 아브라함을 통해 번제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의 의미는 단지 하나님께서 사라의 기대를 꺾으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살피겠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일은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에게 있어서만큼은 이스마엘 모자까지 쫓아내면서 지키려 한 아들을 완전히 빼앗기는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라의 잘못을 여자들의 문제로 일반화해서도 안 되고, 사라 만의 잘못으로 봐도 안 됩니다. 오히려 사라의 잘못은 아브라함의 잘못과 관련이 있습니다. 애굽과 그랄에서 거짓말로 자기 생존을 추구한 아브라함의 잘못이 사라의 자기 애착과 자기 자식에 대한 집착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잘못과 사라의 잘못은 부부가 닮아서 유사한 죄를 지은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복해서 속인 아브라함의 잘못을 수습하신 것처럼 이스마엘 모자를 내쫓은 사라의 잘못도 수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잘못을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는 기회로 사용하셨듯이 사라의 인간적인 행위를 약속의 자녀와 육신적 자녀를 분리시키는 기회로 사용하시고, 이스마엘도 번성하도록 복 주시는 기회로 사용하셨습니다.

 

    정리하면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웃었으면서 자기 웃음이 별 것 아닌 척 부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사라가 자기 아들 이삭을 향해 이스마엘이 웃은 것은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쫓아냈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대해 비웃은 사라지만 정말 웃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이삭을 향해 비웃은 이스마엘,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간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그 이스마엘 역시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바람처럼 단순히 이삭과 그의 후손들이 번성하고, 큰 나라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삭을 통해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겨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런 영적인 복은 사람이 주도할 수 없고, 사람이 노력으로 확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이삭과 그의 후손들이 누릴 복을 현세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만 물려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 모자를 배제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가 이삭에게만 몰아주려 했던 복, 번성하고 민족을 이루는 복을 이스마엘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사라가 자기 아들에게만 지켜주려한 복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삭의 족보를 통해 참 아브라함의 씨, 참 이스라엘 후손인 예수님이 오시지만, 예수님을 통해 누려야 할 진정한 복, 하늘의 복은 혈통이나 세상적 번성과는 상관없음을 하나님이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때 깊이 감사해야 하지만 깊이 반성도 해야 합니다. 사라는 기분이 좋아서 웃었으나 자신이 하나님을 비웃었던 것을 반성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참된 은혜는 우리를 그저 흥분하고, 들뜨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자격 없음을, 이런 선물을 주실 것을 믿지 않은 나, 기다리지 못한 자신을 회개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살만해지면 딴소리를 하게 됩니다. 자기가 얻은 것을 지키려고, 잃지 않으려고 더 욕심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얻는 은혜를 통해 은혜를 누릴 자격이 없음을 반성해야 하고, 또한 그 은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풍성히 알도록 작동하지 않는다면 헛것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은혜를 경험하든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게 하고 의지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지 살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