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1:1-5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하나님은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종살이하다시피 했던 야곱에게 보상이 될만한 재산이 모이게 하셨고 야곱의 꿈에 나타나셔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재산이 늘어가는 것에 대해 라반의 아들들이 시기하자 라반도 경계했습니다. 어느 날 야곱은 두 아내들에게 라반에게 그동안 겪은 부당한 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꿈 이야기도 했습니다. 두 아내 라헬과 레아는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야곱을 따라 떠나는 일을 두고 뜻이 갈릴 수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두 여자는 아버지 라반에 대한 불만 속에서 야곱의 뜻에 동의했습니다. 이렇게 야곱이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떠나도 되는, 떠날 수밖에 없는, 떠날 수 있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시고 꿈으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양털 깎는 시기가 되었을 때를 노렸습니다. 지금 같으면 전동 이발기 같은 도구로 양털을 깎지만 당시에는 칼을 이용해서 털을 잘라내야 했기에 양털깎기는 많은 인원이 오랜 시간 매달려야 하는 큰 연중행사였습니다. 그래서 라반이 그 일로 정신이 없을 때 야곱은 가족들과 재산과 가축들을 이끌고 도망가듯 출발했습니다. 얼마 후 라반이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사람들을 이끌고 삼일 길을 쫓아왔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만나자 왜 말도 없이 떠났냐고, 자기는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성대하게 축하하면서 보냈을 것이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합니다. 그런 이유는 지난밤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을 판단하거나 건들지 말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때문에 야곱을 꾸짖거나 물고 늘어질 수 없었던 라반은 사라진 자신의 드라빔 신상을 찾겠다며 마치 도둑 앞에 선 경찰처럼 유리한 위치를 가지려 했습니다. 드라빔은 사람 모양의 우상 신상으로써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져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라반의 드라빔을 훔친 것은 라헬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라반에게 자기 가족이 쉬고 있는 텐트들을 다 뒤져보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라반이 이곳저곳을 다 뒤지고 이제 라헬의 장막을 뒤질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낙타에 사용하는 안장을 내려서 그 아래 드라빔을 숨기고 그것을 방석처럼 깔고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라헬은 자기가 생리 중이라 아버지 라반을 맞이할 수 없다고 하자 라반은 라헬의 장막을 뒤질 수 없었습니다. 생리하는 여자는 부정하게 여겨져서 가까이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드라빔을 찾지 못해 큰 소리 칠 명분이 없는 라반은 야곱과 언약을 맺자고 제안합니다. 그 약속의 내용은 자기 딸들을 함부로 여기거나 다른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자기 영역을 넘어와서 손해를 끼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라반은 자기가 원하는대로 일방적으로 맹세를 요구했는데, 그것은 야곱의 재산과 힘이 계속해서 커질 것을 라반이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자기 딸들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에게도 복수, 앙갚음을 할까 봐 걱정한 것입니다. 야곱은 라반의 조건대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했고, 특별히 야곱은 따로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고 자기 가족들과 떡을 나누었습니다. 야곱과 라반은 서로 헤어져 자기 길을 갔습니다.
본문에서 중심 인물인 야곱과 라반은 상반되게 다뤄집니다. 먼저 야곱은 신앙적으로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5절을 보면 야곱은 라반이 자기에게 모질게 굴었지만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셨다고 아내들에게 고백합니다, 또 라반이 자신을 수없이 속이고, 수고한 대가를 보상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라반의 비열함 속에서도 자기를 챙겨주시고, 재산을 늘려갈 수 있도록 일하셨음을 야곱이 고백합니다. 또 앞에서 야곱은 두 레아와 라헬의 출산 경쟁에서 수동적으로 이용당했지만 여기서는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고향으로 함께 가자는 야곱의 말에 서로 라이벌 관계였던 두 여자가 한마음으로 찬성했습니다. 아내들에게 이끌리던 야곱이 이제는 아내들을 통솔한 것입니다. 또 야곱과 라반이 언약을 맺은 후 그 증거로써 돌로 된 기둥을 세우며 라반은 여갈사하두다라고 불렀지만 야곱은 갈르엣이라고 부름으로써 라반과 다른 자신의 언어로 차별화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고백했습니다. 나아가 야곱은 라반과의 사이에서 두려운 긴장이 일단락되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가족들과 신앙적 교제를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라반은 우스운 꼴이 됩니다. 28절을 보면 라반은 달아난 야곱을 쫓아와서는 야곱이 말도 없이 도망갔기 때문에 자기 딸들과 손자들에게 인사도 못했다며 야곱을 비난했습니다. 또 야곱이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딸들과 손자들을 불행하게 할까봐 야곱에게 맹세를 시켰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기가 딸들을 아끼고 정서적 유대감이 깊은 것처럼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15절을 보면 딸들은 아버지가 자기들은 외국인처럼 대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들을 노예를 다루듯 팔았다는 뜻입니다. 라반은 야곱이라는 유능한 일꾼을 얻기 위해 딸들을 이용했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자기를 속였다고 말했지만 반대로 라반이 속여 왔고, 야곱이 딸들을 함부로 대할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자기가 딸들을 함부로 이용한 것은 라반 자신이었습니다. 딸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남들은 다 라반에 대해 알고 있는데 라반은 자기에 대해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라반을 조롱하게 만듭니다. 그의 딸들과 야곱이 얼마나 기가 찼을까 생각하게 만듭니다. 결정적으로 라반은 자기가 섬기던 신 드라빔과 함께 조롱당합니다. 라반이 그렇게 귀하게 여긴 드라빔은 딸 라헬의 주장대로라면 여자의 생리에 의해 부정하게 되었고, 방석과 엉덩이에 깔려 우스운 꼴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숭배, 예배하는 것을 닮게 되어 있는데, 욕심에 찌들어 다른 사람들을 도구로 여겼던 라반이 도대체 무엇을 섬겼는지가 탄로 나면서 드라빔과 함께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야곱은 라반 아래에서 고생하며 점차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라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라반은 여호와를 언급 하긴 하지만 하나님을 이용해 계속 부자가 되려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야곱의 하나님 덕분에 자신이 부자가 된 것을 인정했고(30:27) 야곱을 계속 붙잡아두려 한 것입니다. 라반은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자신의 악함을 통제하시는 일도 경험했지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라반에게 하나님은 그저 여러 신들 중 하나였습니다. 신통한 점쟁이를 만나 성공해도, 귀신을 봤다면서 벌벌 떤 경험을 해도 그것을 경험한 자의 인격과 도덕성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라반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라반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미약하고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 은혜와 용서가 필요한 죄인인 것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자기를 아는 것이 함께 있어야 바른 변화가 일어나는데 라반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라반의 문제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했지만 정작 라반 자신에 대해 모른 것을 본문이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악한 일들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고 다른 사람만 비방하고, 자기가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다른 피해를 입을까봐 안전을 확보하려고 선수를 쳤습니다. 마치 동생 아벨을 죽여놓고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누가 자기를 죽일까 두렵다고 불평한 가인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내가 라반이나 가인처럼 남들에게 큰 비참을 안기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남들을 힘들게 하는 여러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직접 깨닫게 하실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눈물과 신음과 호소와 충고와 눈빛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통해 깨닫게 되는 나의 문제를 무시하고 회피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을 통해 자기 문제를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상대에게 내가 이용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참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사준 밥, 베푼 도움, 상대가 앞으로 나에게서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유익이 나에 대한 평가를 덮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의도적으로 나의 문제에 대해 듣는 일을 내가 회피할 뿐 아니라 듣지 못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라반처럼 사람들이 욕을 해도 바뀌지 않는 사람, 국민들이 욕을 해도 바뀌지 않는 권력자나 꼰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람들의 평가와 비난을 피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여기시는가를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심판 때에 사람들이 지적하지 못한 문제들까지 다 알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 사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의 많은 문제를 쉼 없이 나열하시면서 계속 지적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참으시고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모든 문제를 다루시지 않고 라반을 통해 적절하게 일부만 다루셨듯 우리도 그렇게 다루십니다. 하나님의 그런 다루심이 있을 때에 라반이 아닌 야곱처럼 변화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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