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49) 창세기 32:1-32

따뜻한 진리 2023. 4. 9. 18:42

창세기 32:1-3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야곱은 자기를 쫓아와 죽일지도 모르는 라반에게서 떠났지만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 에서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먼저 1-2절을 보면 그는 길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납니다. 야곱은 20년 전 아버지 집을 떠나 라반에게 갈 때 하나님의 사자들, 천사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반대로 라반을 떠나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도 천사를 본 것입니다. 야곱은 20년 전 천사를 본 곳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었고, 이번에는 마하나임 즉 하나님의 군대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군대로 해석된 히브리어 원어는 두 무리, 두 진영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에서의 군대를 만날 것에 대한 전조이기도 하고, 에서의 군대에 대비하기 위해 자기 가족과 가축을 두 무리로 나누어 대응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천사들을 진영, 혹은 군대라고 해석한 것은 야곱이었기에 그런 표현은 그의 마음 상태와 연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년 전 집을 떠나 전혀 모르는 새로운 거처를 찾아 갈 때는 하나님이 자신의 집이 되어주시는 것을 바라면서 천사들을 본 경험을 하나님의 집, 벧엘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이제 두려운 형으로부터 보호해 줄 내 편이 필요할 때는 천사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인식하면서 마하나임으로 이름 붙인 것입니다.

 

     그렇게 야곱은 형 에서한테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형의 마음을 바꾸고자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야곱은 자기 재산의 상당 부분을 에서에게 선물로 바치겠다고 사람을 통해 전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의 반응은 알지 못한 채 단지 그가 사백 명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말만 전해 듣습니다. 400명은 당시 상당한 규모의 군대였기 때문에 야곱은 두려워 벌벌 떨었고 에서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자기 무리의 사람들과 가축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쪽이 공격을 받으면 다른 한쪽이 도망칠 수 있도록 대비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9절과 12절을 보면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 선조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시라고, 또 20년 전 야곱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28:15) 자기를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야곱은 계획대로 에서를 위해 가축을 여러 떼로 나눠서 맨 앞에 보내고, 그 뒤에 자기 가족들을 따라가게 합니다. 에서에게 바칠 선물과 가족들이 차례로 얍복강을 건넌 후 야곱이 혼자 있을 때 누군가가 나타나 야곱과 힘겨루기를 했습니다. 그는 천사 같기도 하고, 야곱은 그를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이 밤새도록 그를 놓지 않자 그가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탈골이 됐는데도 야곱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자기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고 하자 그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축복했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다가오는 형 에서의 위협 속에서 살고자 하는 절박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미리 보내 에서의 움직임을 살폈고, 에서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선물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준비했고, 혹시라도 에서가 공격할 때를 대비해 살기 위한 방법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인생 중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고백한 적은 여러 번 있지만 기도한 일은 본문에서 처음 드러납니다. 야곱은 형 에서 때문에 겁이 난다고 하나님께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야곱은 살고 싶었습니다. 그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많은 자손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도 중에 언급한 것은 그 약속이 이뤄지기 위해 자기를 살려주셔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린 태도에는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는 에서를 마주하게 될 자기 무리들 맨 앞에 선물을 배치하고, 그 다음에 가족들을 두고 자기는 맨 뒤에 있었습니다. 야곱은 기도했어도 두려워했고, 이기적이었습니다. 자신이 잘못을 했으면서도 두려운 형 에서를 만나는 일에 앞장서지 않고 맨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선물과 가족들을 방패 삼아 도망치거나 살아남을 궁리를 한 것입니다.

 

     그런 야곱과 하나님이 씨름을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씨름한 자의 정체를 알 수 없지만 그는 분명 육체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야곱과 힘겨루기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먼저 잡으셨는지, 야곱이 하나님 같은 그를 먼저 잡았는지 알 수 없지만 밤새도록 긴 씨름이 지속되었습니다. 그 씨름이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편에서 힘이 약하시거나 야곱의 힘이 초인적이어서가 아니라 야곱과의 긴 씨름을 위해 하나님이 힘을 조절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을 다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반대로 야곱이 오랜 시간 그를 놓지 않고 버틴 이유는 복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야곱은 그동안 고생하면서 이룬 모든 것을 잃고 죽게 생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주시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이 원하는 바를 약속해주시기 전 그를 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야곱을 죽이실 수도 있었지만 그 정도의 고통만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30절에서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곳을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브니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야곱은 자신과 몸싸움을 한 자가 정확히 누군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자신과 겨루어주신 것이었고, 그 접전 속에서 자신이 죽었어야 하는데 살려주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만난 야곱은 가장 큰 위험 요소가 형 에서라고 생각했겠지만 인간에게 진정한 위험은 죄인을 멸하시려는, 영원히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야곱은 자기를 죽이려는 형을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이야말로 죄인인 그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셨습니다. 그것을 야곱이 깨닫도록 하나님은 밤새 야곱과 씨름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형의 손에 죽기 전 하나님의 손에 끝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세상 경쟁에서 뒤처지거나 가난해지거나 무시당하거나 홀로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반드시 처벌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어야 합니다. 그저 형에게서 살려달라고, 자기에게 축복해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죄인인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회개했어야 합니다.

 

     죄인이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서 살길은 새로운 자로 여김 받는 것, 새사람 되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분을 새롭게 바꾸셔서, 악한 자를 의롭게 여겨주셔야 우리는 영원한 비참함과 두려움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도록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야곱이 이겼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강하고 더 대단하다는 뜻도 아니고, 이제 야곱의 신앙이 완성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후에도 야곱은 여전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신 것은 단지 야곱이 하나님께 절박하게 매달린 행동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야곱이 충분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주권적으로 그를 새롭게 여겨주신 것입니다. 야곱의 믿음이 불완전했지만 그가 자기 목숨을 걸고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매달렸을 때 하나님은 그를 새롭게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든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든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길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야곱이나 그의 새로운 이름 그대로 불리게 된 후손 이스라엘 민족이나 우리들이나 죄 가운데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길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신 예수님께 매달릴 때 우리는 죄로 인한 두려운 결과들을 피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