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4-7 (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몇 주에 걸쳐 1절에서 3절의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과 한편이 되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망치며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죄인들이 맞이하게 될 결과는 무엇입니까? 현세에서 헛된 일을 즐거워하다가 허무함과 고통을 겪고, 심판 후에 영원한 지옥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길을 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4절에서 다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소망이 없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그냥 두시지 않고 무엇인가를 행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4절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어 신약성경 원문에는 ‘그러나’라는 뜻의 단어 ‘δέ’가 4절 문장 앞에 있고, 영어 성경에도 ‘but’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한글 성경에는 ‘그러나’ 가 빠져있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죄로 인한 인류의 절망적인 상태를 말했습니다. 이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사탄 아래에서 인간들이 어떤 노력과 시도를 해도 멸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을 발전시키고, 교육 수준을 높이고, 국제 연합기구들이 만들어져서 아무리 협력하고 평화를 위한 노력을 해도 질병과 재난과 갈등과 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인 이상 해답이 없습니다. 미래에도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해결책이 있고, 그것을 우리에게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의 세상은 어둡지만 바울은 드디어 이 ’그러나‘를 통해 우리에게 빛이 비취는 것, 소망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죄인들의 이 세상은 부정적이지만 그렇다 해서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비관적이지도 않고, 도피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맡기신 자기 인생, 시대와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내고, 인정을 받아야 하지만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진정한 해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섬기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력으로 대단한 것을 해낸 것처럼 흥분하고 즐거워하고, 장밋빛 미래를 전망할 때 성도는 ‘그러나’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대로 무서운 전염병과 환경 재앙과 전쟁이 일어나 온 세상이 두려워해도 ‘그러나’ 하나님께 답이 있다고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한, ‘그러나’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태도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인 우리,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는 바로 ‘그러나’ 를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한 긍휼로 묘사했습니다. 긍휼이 무슨 뜻입니까? 또는 자비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상대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태와 상황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태, 외부의 도움 없이 그냥 두었다가는 계속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장면, 어떤 사람을 볼 때 불쌍하다고 여깁니까? 우리는 부모를 잃은 채 울고 있는 아기, 심하게 다쳐서 피흘리고 있는 짐승, 너무 가난해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불쌍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긍휼이 필요한 불쌍한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대상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 것을 자기 백성에게 기대하십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에게 다른 생명과 이웃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 것을 가르치셨고, 예수님께서도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시고, 살려주시고, 먹여주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생명들을,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질 수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죄인이라는 상태가 불쌍합니다. 죄인인 인간은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불쌍한 존재라고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이 불쌍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내가 부자가 아니라서, 남들보다 좋은 집에 살지 못하고, 돈이 없어서 불쌍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또 아픈 곳이 많아서 불쌍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불쌍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가장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은 바울이 앞에서부터 계속 말했듯 죄인이기 때문에 불쌍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악한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고, 나의 인생을 망치는 악한 죄들과 습관을 끊을 수 없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결국 지옥에 처할 자이기 때문에 불쌍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복이 되시고 영광이 되시는 하나님을 모른 체하고, 헛된 복과 헛된 영광에 속아서 살기 때문에 안타깝고 불쌍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자신이 불쌍히 여겨지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불쌍하게 여겨지는 요소는 어떻게든 드러나지 않도록 숨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것이 있는 사람을 도울 때도 그 사람의 자존심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는 일에 민감합니다. 비장애인, 차상위 같은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은 부족함 없는 당당함, 자신감, 멋짐을 추구합니다. ‘플랙스’ 라는 말로 대표되는 보란 듯 자기를 자랑하는 태도, 과시가 유행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중시하는 외형적 불쌍함은 내면의 불쌍함을 깨닫는 일에도 영향을 줍니다. 자기 자랑과 높은 자존감이 종교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불쌍히 여김 받아야 한다는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나라들은 결코 누구도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보호해 주려고,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사력을 다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긍휼이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말한 것은 우리가 불쌍한 존재임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신을 불쌍한 존재인 줄 아는 것이 마땅한 것이고 살길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 다윗은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불쌍히 여김 받기를 원했고, 선지자들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길임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3절이 말하는대로 허물과 죄로 죽은 채로 태어난 자들이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불순종의 아들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답이 없는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인정합니까? 우리 자신이 불쌍하고 참혹한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게 될 것입니다. 또 성도가 갖춰야 할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입니다. 자신이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의 겸손은 거짓입니다. 겸손하다는 칭찬을 받기 위한 연기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의 겸손은 자기공로를 위한 노력에 불과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신을 인식하는 자는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시인하며 불쌍히 여겨달라는 자의 바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불쌍한 죄인인 자신을 볼 게 될 때 우리는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처음 믿을 때만 불쌍상한 죄인인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불쌍한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이 있다해서 더 이상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죄, 교만, 간사함, 무능, 고집, 죽음, 망할 수밖에 없는 죄의 요소들을 더 많이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만족의 기도를 헛되게 한 것과 달리 세리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고백해야 합니다. 겉모습은 불쌍하지 않게 그럴듯하게 꾸미고 행동도 고상하게 하지만 사실은 부끄럽고, 안타깝고, 비참한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모습, 실상을 보게 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게 되고, 사랑을 입는 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했듯 나는 부끄럽고, 불쌍한 자이지만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고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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