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에베소서 강해 19 에베소서 2:1-3 (4)

따뜻한 진리 2024. 1. 7. 17:28

에베소서 2:1-3 (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몇 주 동안 우리는 이 세상 풍조를 주도하고 있는 공중 권세 잡은 사탄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거짓 아비 사탄을 닮아 그의 아들들이 된 인간은 참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지만 에덴의 삶보다 불행해지고, 악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비참한 상태에 대해 바울은 3절에서 인간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한다고 말합니다.

 

     육체라는 것은 우리의 몸을 뜻하는 말입니다. 몸 또는 육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매우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몸이라는 단어는 신체에 일어난 일을 그대로 묘사하거나 긍정적인 내용에서 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예수님의 몸이라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육체라는 표현은 주로 부정적인 맥락 속에서 사용됩니다. 육체는 주로 죄 아래 있는 인류 전체, 심판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육체, 육신이라고 말합니다. 또 갈라디아서 5장 17절을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처럼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거스르는 인간의 상태를 가리킬 때 육체가 사용됩니다.

 

     인간은 심장만 뛴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감각,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있어야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른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살아있어야 참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로 태어나기에 영적으로 죽은 채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말한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좀비가 영화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죽은 채로 걸어다니는 모든 인간들이 좀비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살아 활동하지 않고, 몸마저 죄에 사로잡히면 본성에 의해 살아가는 짐승보다 추악한 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육체가 된 인간은 식욕을 비롯한 여러 육체적 욕구에 이끌리지만 자신을 진정 유익하게 할 영적인 욕구에 이끌림을 받지 못합니다. 영적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영혼을 돌볼 줄 모릅니다. 자기에게 진정한 복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인간들은 성령이 아닌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삽니다. 그래서 3절에서 바울은 죄인들이 악한 영에 저항하지 못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그것에 지배되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몸의 필요를 채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여러 가지를 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본적 욕구를 정당하게 해결하는 것은 선한 것입니다. 몸은 건강을 위해 돌봄과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만 위할 수 없습니다. 몸을 즐겁게 하는 것만으로는 참 행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향해 있어야, 영혼이 거듭나 살아있어야 몸도 바른 복을 누릴 수 있고 바르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영혼이 서로 영향을 주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거듭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고 있으면 몸도 바르게 다룰 수 있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성도는 몸의 필요를 채우고 몸을 돌보는 과정에서도 먹든지 마시든지, 몸을 가지고 고생을 하든지, 쉼을 누리든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결과를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는 감각이 없는 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자는 욕구 자체에 몰입되어 몸만 상하는 일을 도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극적인 음식, 눈이 즐거운 이미지와 영상들, 흥분을 주는 문화와 게임을 즐기면서 그게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자기 행복을 키우는 일이라고, 나는 고생했으니까 이런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허무함과 피곤이 늘고,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내가 주인으로서 그것들을 즐기는 것이 아닌, 음식이나 게임이나 문화 컨텐츠가 나를 사로잡아 내가 그것의 노예가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런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살수록 우리는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을 바라게 되고, 쉽게 흥분하게 되고, 더 많은 허무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몸을 위하는 것 같지만 반대로 망가지는 자기 몸을 보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것을 극복하겠다고 또 다른 형식의 육체의 욕심을 따릅니다. 예를 들면 탐식으로 자신의 몸을 망치고는 멋진 몸매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이번에는 자랑할 만한 자기 몸을 만들기 위해 또 육체의 욕심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의 욕심은 끊임없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탐식과 낭비와 게으름과 교만과 허영심과 시기와 다툼 속에 갇힙니다. 인생을 헛된 일에 낭비하면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른다는 것은 단지 몸의 욕망에 집착한다는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정신적이고 고상한 것을 추구하는 것도 육체적일 수 있습니다. 지식을 추구하는 것, 책을 많이 읽는 것, 분별력을 갖추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정신적인 일이지만 그것마저 육체적인 일이 되기 쉽습니다. 지식이 자기 자랑과 방어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육체적 결점을 가리기 위해,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자기는 남들보다 바르다는 만족을 얻기 위해 지식을 사용하기 쉽습니다. 세상의 지식뿐 아니라 신앙적 지식 역시 육체적일 수 있습니다. 자기 몸의 욕망에 빠지거나 자기 몸을 자랑하는 일이 아닐지라도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은 육체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동기가 아닌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일은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일입니다. 이렇게 죄인은 몸만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도 육체적이 되어 죄의 욕망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우리 시대 인간들은 점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과 풍요가 인간을 육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형상, 인간의 고귀함과 품위를 내던졌기에 짐승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고, 짐승을 더 사랑스러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몸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만 육체가 원하는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육체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기 몸을 이 세상 유행과 소비문화와 쾌락에 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로 우리의 몸을 꾸미고, 즐겁게 하는 것이 나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지만 반대로 이 세상은 우리의 육체를 통해 우리를 종이 되게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합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지키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건강하게 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몸은 주님을 위해 찬양하고, 땀 흘리고, 상하고, 늙어가고, 죽어가는 몸이어야 합니다.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몸을 닮는 몸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