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되는 거듭남 (요 2:23-3:12)

따뜻한 진리 2015. 2. 15. 23:03

요한복음 2:23-3:1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참 성전이신 자신의 육체가 죽으면 다시 살게 될 것을 말씀하셨지만 당시에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부활 후에 그 말씀이 기억나서 이해하게 되었고 믿었다고 2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종교일지라도 인간의 어떤 행위나 성장이나 변화가 구원을 가져올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만 죄인들이 살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이해,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위해 죽으시고 살아나셨는지에 대한 믿음이 구원에 직결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고 다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랐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본문이 사람들의 믿음을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표적을 보고 믿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육적인 믿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죽으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육적 욕망에 근거한 이해를 가지고 믿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초기에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이 땅에서 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구약에서 오래전부터 말해왔고,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들과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분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의 표적이 신기해서 그 능력을 믿는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 자체로 인한 믿음은 오해일 뿐입니다. 성경의 말씀이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든 분명한 언어로 계시된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그냥 예수에 대한 자기 경험과 좋은 인상을 가지고 그게 예수 믿는 것이라고 고집하는 사람이 그 때나 지금이나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믿지 않으셨습니다(24-25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분석해주지 않아도 예수님은 사람의 속을 훤히 알고 계십니다. 그런 사람들의 상태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어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만나보고는 싶었지만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며 그분의 수준과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보이신 표적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이해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는 말을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대해 한 말과 다른 주제, 딴 소리를 하시는 듯 하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속을 이미 아시고 그들을 의지하지 않으셨다는 앞 구절의(2:24-25) 실례를 보여준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니 범상치 않은 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인정하게 되었고 예수님 앞에서 그런 고백을 함으로써 예수님을 인정해드리려고 했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가치를 확인하는 일이거나 예수님을 높여드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를 칭찬하고,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호의를 갖게 되고, 의존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의 인정과 기대에 의탁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정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진술, 호감, 기대가 아닙니다. 그런 말들을 내뱉는 사람은 내가 이만큼 예수님을 알아보고 인정하고 믿어드린다면서 은근히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지위와 종교적 공로와 통찰과 권위를 근거로 예수님을 인정해드림으로써 자기가 그만한 수준이 된다는 것을 자랑하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필요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노력, 공로, 탁월한 수준, 땅에 근거한 자신의 가치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다시 태어나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그런 말씀에 충격을 받았는지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갈 수 있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고, 그것은 물로, 바로 성령을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절의 물과 성령 두 가지가 거듭남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 아니라 물이 의미하는 것 바로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일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히 일어나는 사실입니다. 마치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바람을 피부로 느낀 자는 그것이 분명히 어디선가 불어와서 어디론가 가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사람이 의도하지 않은, 의도할 수 없는 새로운 출생을 경험한 자는 성령 하나님께서 어디선가 임하셔서 자신을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 니고데모는 그런 성령의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인 10절은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당연히 그런 것들을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약을 열심히 연구하고 규율들을 인간적으로 지키려했지만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려는 핵심은 놓쳤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위함입니다. 바로 죄인들을 대신할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믿는 것이 그런 바람과 같은 성령이 일하시는 동기와 목적이 되는데 그들은 구약을 통해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이 드디어 자신들의 눈앞에 오셔서 직접 말씀하시고, 가르치셔도 누구이신지, 무슨 말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그분이 하늘 보좌로부터 죄인들을 위하셔 낮아지신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죽임 당하시려고 죄인인 피조물들에게 앞에 서신 것을 말합니다. 죄인인 사람은 이 땅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그 일인 그분의 오심을 보고 성령께서 주시는 변화인 거듭남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땅의 일입니다. 진정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진정 이뤄져야 하는 땅의 일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무슨 소리인지 사람들이 몰랐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일, 천상의 일, 장래의 일을 말하면 믿겠냐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려면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가 하나님 나라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제대로 보게 되고, 그 앞에 마주하고 있는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만족스런 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마치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권위를 독점하려 하지만 자신들 눈앞에 나타난, 자신들을 살리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대단한 열쇠를 종교적으로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명백한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가 눈앞에 오신 것을 몰라보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위대하신 분인 줄로 인정할 실력은 있었지만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자기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자신을 살리실 구주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 앞에, 이 땅에 함께 하고 계신 그 하나님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는 제자들도 그렇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세상을 아무리 탐색해도 구원의 방법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지은 창조주가 있다는 것 정도는 깨달을 수는 있지만 그분이 이 땅에, 내 곁에 오셔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처럼, 니고데모처럼 사람이 축적한 권위와 지식을 통해 예수님을 판단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보려고, 가까이하는 정도만 합니다. 마치 교회를 그렇게 이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일들은 그저 세상에 흔한 관계 맺기, 인맥확장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렇게 대하고 이용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자만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앞에 서신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는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친히 오셨다는 것에 몸둘바를 모르게 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이분이 어떻게 자신이 지으신 땅에 피조물로 와 계신 것인가!’, ‘죄인인 나를 대면하시면서 상대해주실 수 있는가!’하고 놀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는 예수님에 대한 그럴듯한 평가를 내리기 이전에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의 나를 향한 판단에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아는 체하기 이전에 그분이 나를 아시는 것 때문에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