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인간을 위한 종교가 모독당하다 (요 2:13-22)

따뜻한 진리 2015. 2. 8. 23:59

요한복음 2:13-2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는 본문의 성전청결 사건이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에 있었던 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은 처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사건의 시간 순서보다는 의미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강조하려는 예수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앞의 사건인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는 일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종교, 눈에 보기에 그럴 듯한 위선적인 것들이 폐기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진실, 진리이신 예수님이 그 거짓들을 대체하실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 죄문제를 해결하는 일, 하나님을 진실하게 예배하는 일에 있어 늘 실패하는 인간이기에 그것을 실패하지 않고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참된 분이 예수님이심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유월절이 가까워 오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습니다. 성전 안에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왜 있었는가 하면, 성전에 제사를 드리려고 멀리서 온 순례객들의 편의를 위해서였습니다. 멀리서 오는 사람들일 경우 제사용 동물들을 직접 데리고 오게 되면 오는 동안에 다치거나 병들어 흠이 생겨서 제물로 적합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서 직접 제물을 파는 것, 돈을 바꾸어 주는 등의 장사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것을 위해 돈을 바꾸는 환전소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는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노끈을 가지고 채찍을 만드셔서 양과 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상들을 엎으셨습니다.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 원래 구약에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희생제사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백성은 제사를 위해 살아있고 흠 없는 동물을 구하면서 자신의 죄를 생각해야 했고, 그 생명의 희생을 통해 나의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또 그러한 제사를 섬기는 제사장들과 바른 신앙을 지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이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서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들을 가지고 인간을 위한 종교로 전락시켰습니다. 성전에서 제사 행위는 고작 양심의 부담을 더는 일이었고 그 거래들은 그 종교적인 위선마저도 편하게 하도록 허용된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이익을 위한 거래와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타락한 종교권력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란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당신이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다른 무슨 신기한 이적을 보인다 한들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던 자들,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부정하고 싶은 자들에게는 그 성전정화 사건이 중요한 빌미가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도대체 무슨 권리로 이러한 행위를 하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이 성전은 자기 몸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육체가 사람들에 의해 죽게 되면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건물 성전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줄 알고 성전 모독죄라는 죄명을 예수님께 씌웁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이 성전을 헐라는 말을 오해해서 예수님을 죽인 것이 결국 예수님의 의도하신 뜻 그대로 이뤄지게 했습니다. 그들은 이 성전이 예수님이 자기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인 줄 알지도 못했으면서 이 성전인 예수님의 몸을 죽인 것입니다. 자기들도 모르게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완성하셨습니다. 구약에서의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성전으로 제물을 가져와 제사를 드리면, 제사장은 죄사함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질병이 깨끗하게 나았는지를 진단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전에 와야 할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성전을 생애 마지막에 한번, 그것도 제사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에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이렇게 무시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성전의 기능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병든 자들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기능을 직접 수행하셨습니다. 성전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필요가 없고, 대신 완전하신 예수님께서 그 사역을 하셨고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깨닫고, 인정하고, 해결 받게 하시려고 은혜의 수단을 항상 주셨습니다. 율법, 제사, 성전 등이 그런 방법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마저 늘 변질시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는 더 이상 진실함이 아닌 죽은 형식, 의미 없는 전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방법,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방법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의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진실한 변화를 있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방법이 사람들을 위하는 종교로 변질되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끼리의 거래로 나타났습니다. 죄책감을 덜어주고, 위로를 주고, 그러기 위해 편의를 제공할 때 종교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고, 종교지도자들도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대교입니다. 카톨릭입니다. 백성과 지도자는 암묵적으로 함께 그런 종교를 만들고 그것이 문제인 줄 알면서도 서로에게 이익이 되니 조용히 있는 것입니다. 만들어낸 신성화된 인간의 권위로 침묵을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성전에서의 소란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 아래에 사람들을 억압하고 이용하는 일이 침묵 속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것에 대한 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행위를 하신 것은 성전의 장사 그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성전의 타락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사람들이 원하는 종교의 형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몸을 찢으심으로 거짓된 성전을 파기(破棄)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갱신(更新)된 성전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도 나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법을 주셔도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신 것을 의존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배워서, 깨달아서, 개선되어서, 성숙해져서, 발전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 은혜로만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현실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우리가 적극적인 무력사용을 주님이 용인하시는 근거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폭력, 정치적 폭동 같은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선동이나 권력을 가지고 승리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폭동에 실패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소란, 무력행사처럼 보이는 일을 하신 것은 죄를 숨길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를 지적하시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힘으로 해결하시려고 시도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인간 본위로 변질된 헛된 종교의 위선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죄를 지적당한 자들은 회개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를 들춰내시고, 옳은 말씀하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성전을 인간종교의 장으로 만들어 진짜 신성모독을 한 자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죽였습니다. 그로써 자신들이 진정 죄인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죽으심으로써 예수님이 참이셨고,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심을 더욱 확실하게 증명하신 것입니다. 힘으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는 일로 승리하셨습니다. 가장 약하게 당하는 것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들의 죄를 폭로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드러내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죄인의 살 길을 제시하는 참된 신앙, 진짜 종교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종교심을 매만져 주는 교회, 세상이 납득할 만한 종교로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힘으로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약함으로 거룩함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약함, 겸손이 그들이 원하는 종교가 되고자 하는 일이 되서는 안 됩니다. 성도와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며 인간이 죄인임을, 타락한 세상이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살 길이 있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예수님을 직접 핍박했던 것은 세상이 아니라 유대교였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교회가 예수님을 핍박하고,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조국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