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60-7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 죄인인 우리가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나에게 생명을 준다는 것을 믿는 자가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단절시키는 우리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믿음의 내용을 자기 자신에게 집중시키셨습니다. 자신을 주고 싶으셔서 떡인 자신을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주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생명의 떡인 자신에 대해 가르치신 곳은 가버나움 회당이었습니다. 거기서 말씀을 들은 제자 중 여럿이 그 가르침이 어렵다면서 수근거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는 열 두 제자에 속하지는 않지만 보통의 무리보다 열심이 있는 그룹을 말합니다. 그들의 불만은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선입견, 자신들이 원하는 것과 충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육적인 양식과 육적인 구원 때문에 눈이 멀어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다음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수준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영원한 관점에서는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육적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죽을 몸과 현실의 문제에 관심이 묶여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핑계한 것입니다. 영적인 것보다 현실의 문제가 더 실제적이고, 중요한 과제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진리, 영원에 관한 말씀에 대해 우리도 “어렵다”는 불평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 관심을 가진 자들은 예수님 자체를 보고도 믿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지적 유희나 문제 해결을 위한 능력 발휘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말씀이신 자기 자신을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61절에서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라고 물으실 때 예수님은 단순히 자신의 가르친 내용이 어렵냐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참된 말인 나 자체가 너희들에게 걸림이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정곡을 찌르신 것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자신들 앞에 나타나신 것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외면하고 싶은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그저 가르침이나 지식으로 끝나지 않고 창조를 명령한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 자체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그대로 실행된다는 것입니다. 떡에 관한 말씀 자체가 예수님을 통해 일어날 일이고 예수님 스스로 그 말씀을 증명하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것은 예수님 자체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그 말씀대로 순종한 것을 통해 예수님을 긴밀히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대로 성찬을 진실한 믿음으로 받으면 주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평가한 것은, 예수님 자체를 믿지 못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낸 분임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앞의 5장 42절 말씀대로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고,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신 하나님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62절에서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왜 물으셨을까요? 앞으로 자신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승천해서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되면 믿겠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믿음의 현재 상태와 미래 상태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64절에서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들이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이 사람 예수를 통해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기대하는 바대로 예수님이 안 움직이시면 예수님을 떠나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실상을 알고 계신 대로 그들이 듣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65절에서는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앞의 44절에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나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가 따르는 것을 막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너희가 나를 믿는다는 증거는 아니다. 하나님이 보낸 주신 자만 나를 보고 믿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믿고 싶은대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오는 자를 일부러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온갖 좋은 말로 자기를 믿도록 끌어들이지도 않으십니다. 단지 그들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우위에 두는 자들은 떠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고, 기대를 하지 않는,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듣고 좋아했을까요? 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66절이 말합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떠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신념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기대를 채워주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에게도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했지만 그 역시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는 그의 고백은 우리가 두고두고 깊이 묵상해야할 놀라운 진리이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었던 것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믿는 것은 아니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그도 떠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대로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이 어렵다는 제자들과 열 두 제자들의 믿음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다고, 자신을 버릴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모두를 섬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현대교회는 그런 예수님을 무안하게 만듭니다.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의 믿음을 쉽게 인정해줍니다. 구원은 이미 확보된 당상으로 여기게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지금은 믿음이 없어도 나중에는 믿게 될 수도 있으니까 교회에 머물게 하기 위함이라는 그럴듯한 합리화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 떠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셨습니다. 억지로 자신에게 남아 있도록 다독이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 자기를 팔만큼 구원과 상관없는 자들이 있다고 드러내셨습니다.
현대기독교는 인간중심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어떤 기대를 거는 것을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이 자기가 원하는 복이든, 좀 고상한 사람들은 사회정의나 사회참여이든 예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거나 그 문제해결의 모범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육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은 예수님 자체가 해결책이고, 예수님 자체를 믿는 것인데 그런 믿음을 갖도록 도전하는 일이 드뭅니다. 그래서 현대교회는 죄인인 자신 때문에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신앙의 핵심으로 두지 않습니다. 그 주님에게는 관심이 없거나 살짝 중시하는 척만 함으로써 잘 믿는 척하고 안심합니다. 그들이 믿는 바는 예수님이 아니라 현실, 즉 "육"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중심으로 형성되지 않은 믿음들을 흔들어 놓으십니다. 우리가 잘 믿고 있다는 착각을 무너뜨리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던 많은 제자들이 결국 떠나게 되었던 것처럼, 열 두 제자들이 배신하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며 버렸던 것처럼,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일에 실패합니다. 다른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왜 믿는지, 교회에 왜 다니는지, 다른 것을 기대하며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자신을 주시려는 예수님을 믿는지 물으십니다. 나 자신보다 예수님 자체를 믿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 죄를 깨닫게 하신 예수님 (요 7:53-8:11) (0) | 2015.05.10 |
---|---|
예수를 아는 척하는 자들 (요 7:1-52) (0) | 2015.05.03 |
나를 먹어야 살리라 (요 6:16-59) (0) | 2015.04.19 |
믿음이 없어도 배불리 먹이신 주님 (요 6:1-15) (0) | 2015.04.12 |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가? (요 5:19-47) (0) | 2015.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