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1-5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초막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아 외국에 살던 유대인들도 이 때 모여 7일 동안 축제를 벌였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이 때를 이용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수님이 자신을 알리는 기회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요청을 한다는 것 자체가 형제들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8절에서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시며 형제들의 요청을 거절하시는 듯 했지만 14절에서 명절 중간쯤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의 요청에 응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목적으로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명절에 사람들 앞에 등장하셨지만 그것은 자신을 더욱 알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믿음이 없는지를 알리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명절 중간에 예루살렘에 나타나셔서 시작하신 일은 가르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공식적인 율법 교육을 받지 않은 예수님이 권위 있게 가르치자, 그것은 율법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자기 맘대로 주장하는 것이라고 폄하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맘대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분의 교훈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참 뜻을 알지 못하면서 율법의 권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24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절 초반에는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수근거리는 정도(12절)였는데 예수님께서 명절에 거기서 가르치시고, 또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일종의 항변을 하시자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설전이 붙었습니다.
그 논쟁의 주제는 ‘예수가 어디서 왔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앞에서와 일관되게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음을 주장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안다고, 어디서 왔는지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너희가 하나님을 믿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중에 나를 보내신 그분에게 내가 돌아가도 너희는 나를 찾지도 만나지도 못할 것이다.(28-29; 33-3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초막절은 유대인들이 출애굽 후 광야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 축제기간 동안 제사장은 매일 성전 제단에 물을 붓는 의식을 했습니다. 그 의식을 통해 광야에서 물이 나온 기쁨을 기억하고, 물이 주는 풍요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 명절 마지막 날 예수님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말씀에 이어 자신이 생명, 즉 성령을 전달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의 생수와 같은 존재, 초막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신데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기는커녕 죽이려고 체포시도를 했습니다(44절).
그들 중 어떤 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어디에서 왔는지 사람이 알 수 없어야하는데 이 예수는 갈릴리에서 온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27절). 또 어떤 사람은 성경에서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이 예수는 갈릴리에서 왔기 때문에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41-42절).
반갑게도 3장에서 등장했던 니고데모가 여기 나타납니다. 니고데모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동료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너희들이 율법대로 한다면서 예수님에게 스스로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는 것은 율법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하며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니고데모 너도 예수와 같은 갈릴리 지역 출신이라 편드는 것이냐’면 조롱 섞인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자가 아니라고 말한 기준들은 성경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갈릴리 출신이면 안 된다는 말이 성경에 없고, 또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야한다고 그들이 믿고 있던 대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성장하셨기 때문에 거기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님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그들은 성경보다 그들의 전통 속에서 만든 우월의식과 지역감정을 이용했고, 예수님의 지적대로 공의롭게 판단할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와서 예수님을 거들어도 니고데모까지 출신배경으로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배웠다고 자랑하고 율법을 수호하겠다고 했지만 제대로 된 정보와 사실을 근거로 예수님을 판단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에 대해 긍정적인 고백을 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31절에서 무리 중 많은 사람들은 다른 메시아가 와도 예수님처럼 많은 표적을 보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40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어떤 자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선지자라고 말했고, 46절에는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던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아서 감히 잡지 못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예수님에 대해 정직하게 반응한 자들이 “미혹”된 것이라고, 율법을 몰라 무식해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를 제대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렀습니까?
유대인들이 초막절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 초막절 축제를 신나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예수를 안다고 판단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일이 교회 밖에서 일어나면 그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우습게도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현대교회를 보면 그런 것을 쉽게 목격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예수 없는 종교와 문화로 전락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제대로 배우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을 중심 삼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르게, 정확하게, 더 알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없는 이상한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더 많이 아는 것을 서로 피곤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이단들이 그런 갈급함을 해결해 줄듯 접근을 하지만 그들의 해석과 교리는 상식 이하의 구조로 되어 있고 짜맞춘든 결론이 납니다. 빨리 신도로 만들어서 이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건전하다는 교회들도 바른 내용을 가르치는 척 할 뿐이지 목적은 동일합니다. 그저 빨리 믿음의 효과를 보는 것이 주 관심사입니다. 그냥 예수를 이용할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행위로 구원 받는다고 여긴 것, 가식적인 행위를 한 것이 그들의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믿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성경을 모르면서 안다고, 예수를 모르면서 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 더 큰 원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것이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성도라면, 구원받은 성도라면 성경 진리에 대해 배울수록 하나님에 대한 확신만이 강해지지 나의 앎과 판단이 충분하다는 확신이 강해질 수 없습니다. 의지할 것은 주님 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주님을 알고 싶은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더 알고자 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를 드리는 자세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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