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53-8:1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그곳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야 하는데 예수님의 생각은 어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그런 행동과 질문은 정말 예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잡기 위한 빌미를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혀 땅에 어떤 글씨를 쓰셨고, 그들이 재차 의견을 예수님께 묻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몸을 굽혀 땅에 글씨를 쓰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모두 떠나가고 예수님과 그 잡혀 온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본문 6절이 밝히는 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 교묘하게 만든 덫을 사용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라고 말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면 사형집행권을 가지고 있는 당시의 지배국인 로마의 통치권을 거스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근거로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지만 정작 그 자신들은 사건을 율법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르면 간음 현장에서 잡힌 남녀는 둘 다 처벌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2장 22절을 보면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여자만 데려와서 처벌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인 여자만을 처벌 대상으로 데리고 와서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죄인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억지로 죄인으로 만들어서 자신들의 권력과 명예를 지키려 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죄인인 이 여인도 이용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간음 현장을 잘도 알아서 그 여인을 잡아왔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사전 정보가 있었고, 예수님을 잡는데 이용하려고 기회를 기다렸다가 그 여자를 잡았을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죄를 멀리하도록 지도해야할 자들이 죄짓기를 기다렸다가 잡아 온 것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자신들이 준수하기 위한 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한 법, 권력을 부리기 위한 법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행위는 다른 사람의 어떤 규칙, 법을 어긴 죄를 이용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죄를 이용합니다. 사회가 한 개인의 죄를 다루면서 그 사회에 누적된 불만을 해소하는 희생양을 삼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힘을 가진 자는 대중의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리거나 자신의 죄를 상대적으로 가리려는 의도를 꾀하기도 합니다. 또 죄인을 공포스럽게 다룸으로써 질서 유지를 하려합니다. 그런 일들이 꼭 넓은 사회, 정치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간에도, 가정에서도, 학교나 회사 같은 작은 집단에서도 빈번히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이용하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법 아래에 함께 평등하게 순종해야 할 자들이 법 위에 군림하며, 약자를 이용하기 위해 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그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 중 도덕법, 형법을 통해 사람 사이에 죄를 분별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그저 죄인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한 당사자나 그 주변인 모두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죄를 범한 당사자는 처벌받거나, 혹은 중죄로 인해 사형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반성하도록,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는 처벌이었습니다. 주변인들에게는 율법의 정죄와 처벌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도 들통나지 않았을 뿐 유사한 죄가 있음을 살피게 하고, 그런 죄를 모방하지 않게 하고, 자기 죄는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안심을 하지 않게 했습니다. 형법의 실행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를 정직히 다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른 사람을 심판할 때 우리 자신을 심판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드러난 한 사람을 통해 모두에게 죄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 율법의 본래 의도가 성취되는 일, 그들이 계속 회피해 온 그 일이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여 십자가에 매달았지만 결국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런 율법의 의도에 불성실하면서도 예수님께는 성실한 대답을 요구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돌로 치라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은 드러난 한 죄인의 문제로 모두를 돌아보게 하는 율법의 의도를 충실히 살리셔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이용하려고 하는 죄인들에게, 율법을 이용해서 예수님마저 죽이려는 자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여인을 판단하려는 그 기준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떠나갔습니다.
모두가 떠나갔을 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정죄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죄인을 심판해야 마땅하신 분이 용서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모든 법이 그렇듯 율법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가 보여주듯 유대인들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고, 그 처벌 앞에서도 모두가 평등하지 않았습니다. 힘의 논리에 따라 어떤 자는 법대로 하고 어떤 자는 솜방망이 처벌을 합니다. 그것은 공의가 아닌 불의입니다. 그 문제를 선지자들이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불공평하게 자신만 처벌 받을 위기에 놓인 이 여인, 도움을 줄 권력이 없는 이 여인을 건지시고, 용서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율법 위에 계신 진정한 권위자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사랑과 공의를 온전하게 나타내실 수 있는 분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하시고 이어서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해야만 용서하신다고 조건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무조건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의 당연한 결과로 그 여인이 회개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이 진정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안다면, 예수님이 날 위해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믿는다면 우리는 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의 거룩하심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자신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여겼을까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그 여인은 ‘내가 돌에 맞아 죽을 것을 살려줘서 고맙긴 한데, 이 남자가 누구길래 나의 죄를 용서한다는 거지’하고 단지 이상히 여기지는 않았을까요? 그 여인이 예수님이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는 분이고, 자신의 죄 때문에 곤란을 겪으신 것처럼 사람들에게 무고하게 핍박당하고 계신 것을 깨달았을까요? 만약 그 여인이 자신의 죄와 관련해서 예수님을 경험하면서 그분이 누구신지를 믿게 되었다면 진정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이 보여준, 율법 앞에서 실패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 여인, 그리고 자신이 실패한 죄인인줄 깨닫지도 못하고 예수님께 뒤집어씌우는 지도자들이 무엇을 말합니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죄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죄를 공정하게 다룰 수 없습니다. 본문처럼 오히려 다른 사람의 죄를 통해 자기가 살 기회로 삼지 그 사람의 죄를 끌어안지 못합니다. 같은 죄인끼리는 다른 사람이 진정 회복되고 고쳐지도록 도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 죄인을 바르게 지적하실 수 있습니다.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는 나의 죄를 깨닫고 다른 사람의 죄를 발견할 때마다 모두 함께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을 통해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의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죄를 발견할 때, 그 결점을 통해 내가 우위를 점하려 하거나, 꼬투리 잡아 죄를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죄를 함께 지고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로 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서로의 죄를 다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필요한 우리 죄인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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