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19-4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앞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자기 살 길을 위해, 맡겨진 양을 버리고 마는 삯군 목자와 같지만 예수님 자신은 자기 양들의 살 길을 위해 자신을 버리시는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버리는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은 군중 안에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자들은 여전히 예수가 귀신들린 자이니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고, 어떤 사람들은 맹인이 눈 뜨게 했으니 믿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이 수전절에 성전 안에서 걷고 계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부터 10장 사이에서 그들은 수차례 예수님과 논쟁을 하는 동안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일관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분명하게 말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이상합니다. 24절에 나오는 대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의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많이 듣고, 많은 지식이 있었어도 그것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하는 재료가 되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믿음이 있으면 분명하고 단순한 진리가 그 믿는 자 안에서 풍성한 영향력을 일으킵니다. 그 증거를 보여준 자가 바로 눈 뜬 자이지 않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었고, 고백했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더 분명한 설명을 요구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서 다시 설명해도 그들이 오해만 할 뿐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믿음이 생길 가능성도 없다는 뜻입니다. 애초에 그들은 주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는 섬짓한 내용이지만, 아마도 그 말은 들었던 유대인들은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믿지 않았고, 그의 양이 아닐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도 믿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해 ‘너희들은 내 양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에 이어서 자기 양이 아닌 그들에게 자기 양들이 얻게 되는 혜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남의 자식들한테 내 자식의 특권에 대해 설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이 자신을 알고 자기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27절). 예수님은 자기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28절 상). 예수님은 자기의 소유가 된 양들이 자신과의 관계를 영원히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8절 하).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양들을 예수님 자신에게 주셨기 때문이고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아버지가 자기에게 맡기신 양들은 영원히 돌보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돌로 치려했습니다. 주님의 양이 얻는 영생과 친밀한 관계가 샘이 나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으니 그런 말을 들었어도 주님과 백성의 관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분노한 이유는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것처럼, 성부에게서 엄청난 권한을 받으신 것처럼 거짓을 말하면서 신성모독을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예수가 자신들보다 못한 인간인 주재에 하나님처럼 되려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분명하게 말해달라고 요구했으면서, 예수님이 분명하게 설명해주시자 죽이려고 했으니 기가 막혀서 우스운 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사람들도 누군가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으면 신적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본질상 하나님과 하나인 존재인데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저 인간이면서 하나님과 동급으로 여김 받으려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신성모독자가 아니라 반대로 원래 신이신 분이 인간으로 낮아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6절에서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인간에 불과한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것, 높아지려는 것으로 보여서 분노를 자아내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려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과 자신은 하나인데 이 세상에 낮아져서 온 것이라고 말씀하시니까 더욱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39절을 보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셔서 요단강 건너편 요한이 세례 주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아무 표적도 없이 예수님에 관해 증언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고백하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많은 이적과 가르침을 경험했어도 믿지 않는 자들과 달리 표적이 없는데도 증언,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앞의 유대인들과 크게 대조됩니다. 본문이 말하듯이 한 무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주님의 양이고, 한 무리는 주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대답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보면 첫 번째,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자기 양들만이 누리는 것들을 먼저, 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양에 해당하는 자들에게 깊은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거기서 들었던 자 중에서 그 양에 속한 자들은 몇 명 안 되었던 것 같습니다. 19절부터 21절을 보면 유대인들 중 믿지 못한 자는 “많은 사람”이었고, 믿었던 자는 “어떤 사람”에 속하는 소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열세에 있는 자기 양들을 위한 말씀에 무게를 두셨습니다. 자기 양들을 안심시키고, 믿음을 확고히 하셨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24절에서 유대인들이 정체를 밝히 설명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하는 것에 회의적인 답변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양들의 영원한 목자가 되심을 설명하시면서 자연스레 다시 한 번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을 가능성이 없는 자들이지만 그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계속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빛을 비추셨습니다. 어둠이 싫어하고 분노할 일을 하셨습니다. 어둠에 속한 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고, 잡으려함으로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 일은 동시에 “스스로” 십자가를 향해서 더 가까이 가시는 일로써(18절)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게 하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목적에서든지 주님은 가망 없는 자들에게도 끝까지 자신을 비춰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상황, 어떤 상태에서도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끊임없이 알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더욱 분명히 아는 것이 믿음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자기 양이 아닌 자들의 무지하고 무례한 요구가 계속되는 중에도 냉소하지 않으셨고, 그들 자신과 예수님에 대해 깨닫도록 그들의 질문에 응하셨습니다. 또 우리 주님은 그렇게 자기 양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약속하심으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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