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35-4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태어날 때부터 볼 수 없었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셔서 그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게 되는 영적인 눈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임을 분명하게 고백했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은 바리새인들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그 사실을 아신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35절을 보면 예수님은 눈 뜬 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인자”라는 단어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보냄 받은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 달려 대신 고난을 당한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말씀 중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요6:27)”,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등에서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씀하신 ‘인자“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 눈 뜬 자는 “인자”의 의미를 완전하게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단어가 자신의 눈을 뜨게 해준 그분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해준 그 분이 자신을 포함한 죄인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회복을 주신, 그런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불합리하게 비난하고 불신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죄인들에 의해 고난 당하시는 인자임을 조금씩 알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그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하고 물으셨을 때 그는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은 그가 지금 자기에게 그 질문을 하고 계시는 분을 보고 있지만 누군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고, 그분의 손이 그의 눈에 닿았고, 그분에게 은혜를 입어 세상을 보게 되었고, 빛 되신 그분을 믿게 되었지만 떠진 눈으로 그분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믿고자 한다고 말한 것은 그가 자신의 믿음을 주님께 고백하고 그분의 뜻을 더 알고 순종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눈 뜬 자가 그런 고백을 하자 그 앞에 계신 분이 자신의 정체를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눈 뜬 자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신 그 분, 바리새인들의 위협 속에서도 부인할 수 없었던 그분을 그렇게 드디어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자들이 그렇게 주님을 애타게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주님을 보게 될 때 감격과 기쁨으로 그분 앞에 엎드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이신 자신을 통해 일어나는 일을 두 가지로,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빛으로서 오신 것이 구원과 심판을 함께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병에 걸린 자가 자신의 상태를 진단해주고 치료해줄 의사를 구하듯 자신이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을 아는 자들은 빛을 구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빛이신 주님께 가까이 옴으로 더욱 잘 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과 세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 그리스도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자, 자신이 어둠 가운데 있음을 모르는 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것입니다. 또는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강렬한 빛에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은 어둠이기 때문에 빛에 의해 눈이 멀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못 느끼는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영원한 어둠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증세를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보였습니다. 40절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우리가 맹인이란 말인가?”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그 자신들이 제대로 잘 보고 있고, 바르게 판단하고, 문제가 없는데 무슨 소리냐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맹인이었더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인데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 이 말씀은 9장 2절에 나오는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는 관념을 뒤집는 말씀입니다. 육체적 장애, 불구가 치명적인 죄를 자기에게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불구상태가 그 자신의 죄를 고정시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맹인의 육체적 문제는 오히려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은혜였습니다. 3절에 나타나는 대로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34절에서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 나서”라고 눈 뜬 자를 무시한 것에서 드러내듯, 마치 자신들은 죄와 무관하게 태어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들은 정말 심각한 영적 불구상태였습니다. 또 영적인 불구가 어떻게 드러났느냐 하면, 지금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41절 말씀대로 아예 눈이 멀어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면 예수님에 대해 무지하고 불신하는 것에 대해 죄가 덜할 것인데 멀쩡한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으면서도 모르기 때문에 죄가 큰, 가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눈 뜬 자가 만난 장면은 주께 구원받은 성도가 나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직접 마주할 때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믿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보지 못한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으로 주께서 그를 움직이신 것처럼, 우리에게는 성경 전체로 말씀하셔서 주님을 믿고 행하도록 하십니다. 눈 뜬 자가 자신을 핍박하던 자들 속에서 믿음을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악한 세상과 부딪칠수록 주의 말씀이 옳음을, 주의 구원하심이 우리에게 절대 필요한 일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시련을 통해 더욱 주님을 사모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눈으로 보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뵙기를 소망합니다. 눈 뜬 자의 고백대로 우리도 주님을 더 친밀히 알고 싶어서 나의 믿음을 고백하고 싶어서, 베푸신 은혜에 합당한 태도를 직접 표현해 드리기 위해서, 애타는 심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분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 앞에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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