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참된 목자가 버리는 것 (요 10:1-18)

따뜻한 진리 2015. 6. 14. 22:57

요한복음 10:1-18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앞에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가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눈 뜬 자의 믿음을 공격하면서 자신들의 어두운 상태를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둠 가운데 있는 영적 맹인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어서 10장 본문은 그 현장에서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양들이 지나다니는 이고, 양들을 진정 위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양과 목자의 이미지 안에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들과 대비되는 예수님 자신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1절부터 5절에서는 예수님이 문으로서의 자신과 목자로서의 자신을 한꺼번에 묶어서 설명하십니다. 양의 으로서의 예수님과, 양들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각각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2절에 나오는대로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는 표현처럼 문도 예수님이고 목자도 예수님인데 자기가 자기를 통과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문과 목자의 이미지로 자신을 둘 다 소개하시기 위해 일종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전환되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표현 방법 때문인지, 아니면 그 자기 양을 부르고 돌보는 목자가 무엇을 비유하는지 몰라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듣는 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6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7절부터 목자를 각각 따로 설명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피면 첫째,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의 문은 거기 있는 양들과 관계된 사람, 즉 목자가 양에게 바르게 접근하는 통로입니다. 동시에 양들이 지나다녀야 하는 바른 길입니다. 그런데 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누굽니까? 강도입니다. 1절을 보면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이 있는 곳에 가는데 문이 아닌 곳으로 넘어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양을 훔치려는 것입니다. 헤치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그런 강도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강도처럼 멀쩡히 있는 문을 무시하고 넘나들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강도 행위는 양들도 그 문으로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들 자신이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안 믿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믿음도 막았습니다. 목자와 양이 만나야만 양이 살 수 있는데, 그들은 그것을 막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일은 양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10절을 보면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또 다른 그들의 행위는 예수님보다 먼저 끼어드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을 확고히 믿기 전에 그 사람의 믿음을 흔들고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 예수님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있었던 어떤 악한 지도자나 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맥을 따르면 그 의미는 예수님을 믿으려는 자들이 생겨났을 때 나타나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믿음을 방해하는 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선수를 쳤습니다.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사람들이 믿음을 가질 것 같으면 이상한 질문으로 공격을 하면서 끼어들었습니다.

 

    앞의 9장에서도 맹인이 눈을 떴을 때 그에게 먼저 나타나서 그의 믿음을 방해한 자들이 누굽니까?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행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양을 훔치기 위해,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예수님 보다 먼저 온 강도였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1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특징을 말씀하시면서 버림의 문제로 접근을 하셨습니다. 버림의 문제로 선한 목자와 그렇지 않은 목자를 구별하셨습니까? 거짓 목자, 삯군은 양들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삯군은 다른 사람의 양들을 돈을 받고 돌봐주는 자입니다. 그러니 맹수가 나타나면 양을 지키지 않고 자기만 도망친다는 것입니다. 삯군에게 양은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입니다.

 

    누가 언제 그런 삯군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눈 뜬 자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눈 뜬 자에게 나타나서 예수가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예수와 그의 말을 믿으면 큰 일 나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마치 눈 뜬 자의 신앙, 구원을 보호해주려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설득대로 눈 뜬 자가 넘어오지 않자 어떻게 했습니까? 934절이 말하듯 쫓아냈습니다. 버렸습니다. 결국 위기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드러내고(12, 13), 양들에 의해서도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게(5, 8) 됩니다.

 

    그렇게 그 삯군들은 자신을 위해 양들을 버리지만 반대로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1절에서 그 말씀을 하셨고, 15절에서도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내놓으시는 일은 무엇 때문입니까? 서로를 알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친밀함은 앞에도 나옵니다. 3절에서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절에서도 양들이 그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양이 목자를 알고, 신뢰하며, 의존하는 것을 보면 그 양들을 통해 선한 목자가 누구인지 드러나게 되어있고, 진짜 주인인 참된 목자도 그런 양을 위해 자신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서로를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눈 뜬 자와 예수님 사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관계를 사람과 시작하시고, 이어 나가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에 그 신뢰와 헌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양을 끝까지 돌보듯 성부께서 성자를 끝까지 인도하시고, 양이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성자 예수께서는 성부를 신뢰하고 의존하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버리지 않는 애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가 먼저 있기 때문에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들인 우리를 끝까지 돌보시는 것입니다. 그 끝은 어디입니까? 바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입니다. 15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7절과 18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것은 어떤 이익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함이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참된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죽음, 희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감동을 주는 것을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을 통해 우리를 완전하고 영원히 살리는 승리와 회복을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