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죽음을 막지 않으신 의도 (요 11:1-16)

따뜻한 진리 2015. 6. 28. 23:36

요한복음 11:1-1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은 제자들과 예루살렘을 떠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위협이 심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장 마지막에 나오듯 예수님이 요단강 근처에서 머무셨다면 예루살렘에서 최소 3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를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나사로는 그의 누이들인 마리아, 마르다와 함께 예수님과 매우 친근한 관계였습니다. 그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나사로가 병으로 죽게 된 것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겠지만, 사람을 통해 말을 전해 들으신 후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신 후에도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이틀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보면 유대로 다시 가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베다니로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몇 킬로미터 정도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위험한 예루살렘 근처로 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을 보면 제자들은 엇 그제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했는데 또 그곳으로 가시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저하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위험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기 때문에 위험에 빠진다.” 예루살렘이 위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위험을 비켜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빛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 죄악의 위험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면 제자들이 위험 때문에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부가적으로 깨닫는 것은 그렇게 얼마든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사람들의 위협, 악행을 비켜 가실 수 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은 사람들의 죄에 자신을 자발적으로 넘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목숨을 버릴 권세가 있는 분임을(10:18) 여기서도 알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런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의 신뢰와 안전감을 가지고 동행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나사로가 잠들었다면 그것은 질병으로 인한 몸의 통증이 잦아들었다는 것이므로 곧 회복되지 않겠냐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은 나름 진지하게,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이해했다는 반응을 하려고 대답한 것입니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제자들의 그런 이해 수준에 예수님은 잠들었다는 표현의 의미를 밝혀서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는데 예수님이 곧장 가지 않고 이틀이나 지체하셨던 것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나사로의 상태가 위급하지 않은 것으로 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틀이 지난 후 나사로가 잔다.’고 하신 것은 이제 나았으니 만나러 가시겠다는 뜻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로 죽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특별히 여기시는 나사로가 죽을 병인 줄 아시면서도 왜 곧장 가시지 않았는지 제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1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 된 일이라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 예수님 말씀은 나사로가 죽은 것이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 잘 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자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도마가 그렇게 말한 의도, 뉘앙스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두려워 말라고, 믿음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로 가는 것이 두려워서 우리는 이제 죽었다.’는 걱정으로 죽으러 가자라고 말했을까요?

 

    아니면 위험한 곳으로 가더라도 예수님이 스스로 그 위험에 자신을 내어주시지 않으면 함께 하는 자기에게도 해가 없을 것을 그가 믿고, 자신감이 생겨서, 주님과 함께 죽어도 좋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겠습니까? 혹 위험이 닥치더라도 그것은 주님이 스스로 그 위험을 당하시기로 하신 것이므로 주님과 함께 죽는 것도 기쁘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정말 이상적인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이든 도마의 고백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주와 함께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주와 함께 죽는다.”라고 하면 마치 사람이 끝까지 목숨을 바쳐 예수님을 지켜 드리는 것, 주님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최후까지 물러서지 않는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와 함께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의 고백은 베드로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고백대로 주님의 죽음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도망갔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에 어떤 사람도 긍정적인 보탬, 선한 도움이 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숭고한 죽음을 당할지라도, 주님을 위해 죽을지라도 주님의 죽으심의 가치를 확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우리는 주와 함께 죽을 수 있습니까? 주와 함께 죽겠다는 고백이 어떻게 믿음의 표현일 수 있습니까?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위험, 망할 것이 예상되어도 주님을 신뢰하면서 가는 것이 주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1절의 말씀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고백을 하면서 모든 일, 나의 죽음까지도 주님의 허락하심 안에서 이뤄지는 것임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 주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 가치와 생명이 그분에게 있음을 믿고, 가장 선한 것이 이미 다 보장된 줄 믿고 가는 것이 주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부를 믿고 가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믿고 가는 것입니다. 즉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주님의 죽으심과 같게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을 드러내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주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성도인 우리의 죽음을 통해 주님을 향한 믿음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 사건이 너희로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로서 자기를 믿는 자에게 죄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주는 하나님이심을 제자들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통해 그 기회가 있게 된 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일이 오래 남지 않은 시점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더 알고 믿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누구를 깊이 사랑하신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나사로입니까? 제자들입니까? 둘 다입니다. 본문은 3, 5절에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무척 사랑하셨음을 직접 언급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적시에 손을 쓰지 않으셔서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또 다시 위험한 예루살렘 근처로 가야 했습니다. 언뜻 사람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사랑할 기회를 놓치신 것처럼, 돌봐야 할 사람들의 상태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양인 우리로 하여금 목자인 자신을 믿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때, 결정적인 순간이 임박해도 하나님께서 지체하시거나 무관심하신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 때 빨리 도와주셔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그 사태가 결국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을 허용하십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신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문제들, 다른 고통은 영원하지 않지만 예수님을 진정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주는 결과는 영원히 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