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몰상식, 상식, 초월상식

따뜻한 진리 2010. 5. 27. 10:17

몰상식, 상식, 초월상식

 

    참된 신자는 분명 비범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평범하지 않음이 참된 신자의 신령함인지 왜곡된 종교심이 드러나는 것인지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만약 어린 아이가 영화 속 슈퍼맨처럼 날기 위해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하면 우리는 잘 타일러서 그 무모한 일을 중단시킬 것입니다. 이것은 미성숙에 의한 몰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골리앗을 향했습니다. 다윗의 행위도 상식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초월상식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무모해 보이는 몰상식한 행위와 초월상식적인 행위는 둘 다 상식을 벗어난 것이지만 현상적으로는 유사해서 두 가지를 쉽게 분별할 수 없습니다. 사리분별이 없고 바른 이해가 없어서 드러내는 몰상식적 행위와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에 의해 일어나는 초월상식적인 행위는 겉보기에는 유사하며 그 자신도 착각할 만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상식을 기초로 초월상식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상식을 버리고 몰상식으로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신자들이 상식을 버리고 몰상식으로 나아갑니다. 몰상식도 초월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 안에서는 광신적인 행동이 믿음이 좋은 것으로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로 신앙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초월상식적인 은혜가 지․정․의에 미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은 시작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초월상식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방법보다는 몰상식적인 거짓 은혜를 구하는 방법에 더 익숙합니다. 그래서 ‘은혜’, ‘뜨거움’을 유지하기 위해 신비한 것처럼 보이는 몰상식적인 일을 추구합니다. 몰상식적인 은혜는 특정한 방법, 혹은 열광에 의해 조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몰상식적 신비는 종교심의 만족을 주고 자기가 잘 믿고 있다는 느낌을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몰상식한 거짓은혜를 추구하는 사람의 특징은 신령한 경험을 한 ‘자기 자신’, ‘경험’, 자기가 받은 ‘계시’를 강조합니다. 또 자신의 ‘영성’으로 영향력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나 사도들을 비롯한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의 임재, 부르심 같은 초월성을 경험했을 때 그것이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지만 그 경험을 계속 목말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경험한 그것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경험으로 시작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있으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신비를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신비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헌신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진정한 초월상식적인 신비를 경험을 한 사람은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과 타인 중심적인 헌신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생존방식과 삶의 이유를 뛰어넘는 거룩한 실재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초월상식적인 고귀한 헌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비에 목말라 하지 않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추구합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길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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