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언약궤를 따라 요단을 건넘 (수 3:1-17)

따뜻한 진리 2015. 12. 27. 23:32

 여호수아 3:1-1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두 정탐꾼을 통해 여리고의 상황을 알게 된 이스라엘은 이제 요단강을 건너게 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1장에서 부분적으로 살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이전 세대들이 홍해를 건넌 것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들의 한계를 극복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모 세대, 출애굽 1세대는 홍해의 기적과 광야에서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그 수준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불순종을 버리고,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받는 삶으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는 일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요단강은 연중 대부분은 쉽게 건널 수 있는 강이지만 이스라엘이 건널 때는 15절에 나오는 대로 곡식을 추수하는 시기여서 언덕에 물이 넘쳤습니다. 원문에 따르면 이 때는 보리 추수를 하는 3-4월의 따뜻한 봄입니다. 이 때 강물이 불어나는 이유는 요단강의 수원지인 헐몬산의 눈이 녹기 때문입니다. 이 때의 수위는 성인 남성이 겨우 건널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여리고성 정탐꾼들은 요단강을 건너서 다녀왔습니다(2:23). 그런데 이번에는 약 2백만 정도의 남녀노소를 데리고 건너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싯딤에서 새벽 미명에 일어나 그 요단강을 향해 떠났습니다. 2절을 보면 요단강에 도착해서 사흘을 유숙했다고 합니다. 왜 사흘을 머물렀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동안을 기다리면서 그들은 불안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사이에서 그 강을 건널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을 갈 것인지 많은 갈등을 했을 것입니다. 출애굽 1세대는 그런 위기의 순간에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았습니다. 그들은 뒤에서 바로의 군대가 죽이겠다고 쫓아오지 않았다면 갈라진 홍해를 안 건너고 버텼을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이제 요단강을 건널 세대들 중에도 부모들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있었겠지만 그런 불만과 불안은 크게 드러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처럼 뒤에서 쫓아오는 적도 없었지만 그들은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강을 건넜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더 나은 것으로 인도하실 것을 신뢰하고 갔습니다.

 

    이스라엘은 강을 건널 때 그냥 건너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맨 앞에 가면 백성들은 이천 규빗, 1킬로미터 뒤에서 거리를 두고 따라가야 했습니다. 그 간격은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언약궤의 진행을 모든 백성들이 잘 볼 수 있게 하는 거리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평지라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저 앞의 언약궤가 안 보일 텐데, 강은 주변 지역보다 낮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아래쪽을 내려다볼 때 1킬로 정도의 거리는 수많은 인파가 시야의 방해 없이 언약궤의 진행을 볼 수 있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궤가 왜 백성들의 선두에 있게 되었을까요? 이 언약궤가 본문에서 반복 강조되고 있습니다. 언약궤는 무엇입니까? 언약궤는 법궤 또는 증거궤라고도 말하며 출애굽기 25장에서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언약궤의 너비와 높이는 각각 75cm이고 길이는 1m25cm인데, 조각목이라는 나무로 만들고 겉은 순금으로 덮었습니다. 긴 막대 두 개를 연결해서 제사장들이 들고 다닐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순금으로 만든 덮개가 있는데, 그 덮개 위에는 그룹이라는, 천사 둘이 마주보는 것 같은 형상이 있습니다. 그 덮개는 속죄소 또는 시은좌라고 불립니다.

 

    언약궤 안에는 물건이 들어있었습니다. 보통 모세가 하나님께 두 번째로 받은 십계명 돌판들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94절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89을 보면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라고 말하고 있고, 역대하 510절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팡이와 항아리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출애굽기 1633을 보면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라고 말하고 있고, 민수기 1710을 보면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팡이와 항아리는 언약궤 앞에 두었던 것인데 이동한다든지 할 때 언약궤 안에 넣었거나 한 것 같습니다.

 

    언약궤 안에 두었든 밖에 두었든 그것들은 언약궤와 함께 다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세 가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아론에 대한 리더십을 인정해 주시려고 베푸신 기적입니다. 두 번째로 만나를 담은 항아리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불평했고 내일도 일용할 양식을 주실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에 만나를 남겨놓았다가 썩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언제까지 내 계명과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만나 담은 항아리를 보관하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십계명 돌판인데,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왔을 때 백성들은 송아지로 우상을 만들어서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돌판을 집어 던졌고, 우상을 갈아 마시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른 돌판에 계명을 새겨 주셨는데, 그 두 번째 돌판을 언약궤에 넣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와 함께 간직된 물건들은 하나님이 늘 은혜를 베푸셨지만 끊임없이 불평 원망하는 백성들의 죄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언약궤는 성막의 가장 안쪽에 있었고,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죄용서를 구하면서 짐승의 피를 뿌렸는데 그 위치가 바로 언약궤의 덮개인 속죄소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 그것을 위해 사람의 죄를 처리하는 곳이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물건들 중에서도 언약궤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어떤 분이시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의 핵심을 담은 물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는지를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가 맨 앞에서 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 인도하시고, 좋은 땅, 복된 장래를 허락해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실상은 언약궤에 담겨진 것이 잘 말해주고 있는데 그 뿌리 깊은 죄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덮으시기 때문에 동행할 수 있는 것이고, 인도를 받아서 가나안을 선물로 얻는 것이라고 깨달았어야 합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담그자 물길이 상류쪽에서 끊기고 쌓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마른땅을 건너갔습니다. 드디어 순종을 통해 선물을 받는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죽어도 마땅한데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어 마땅한 자들인 것을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똑똑히 봤습니다. 홍해를 건너면서 수장되는 애굽 군대를 통해서 또 봤습니다. 고집스럽게 불순종한 그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임당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대를 생존하게 하셔서 이제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요단을 왜 건너게 하셨습니까? 벌써 죽었어도 마땅한 자들에게 왜 살 길을 열어주십니까? 순종할 기회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4절에 나오는 대로 우리 인생은 늘 지나보지 못 한 새로운 길입니다. 이미 죽었을 수 있는데 다시 주시는 기회입니다. 그런 길들을 지날 때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허물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바라보면서 떠올렸을 것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대속을 의미하는 언약궤를 바라보면서 순종의 땅으로 건너간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순종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죽을 일들이 쌓여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기적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흘리신 피로 죄를 덮어주셔서 고난을 대신 당하셨기 때문에 주어진 것임을, 순종할 기회를 연장시켜주시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