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4:1-2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따라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동안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계속 앞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약궤는 어느 정도 가다가 요단강 중간에 멈춰야 했고, 언약궤와 거리를 두고 뒤따르던 백성들이 이제는 언약궤를 지나서 앞서 갔을 것입니다. 모두가 강 건너 서쪽으로 이동한 후에 언약궤는 마지막으로 강을 빠져나왔습니다. 앞의 3장이 그 언약궤를 중심으로 요단강을 건넌 것을 진술한다면 본문 4장은 기념으로 가지고 나온 열 두 개의 돌을 중심으로 요단강 도하를 다시 한 번 진술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요단강을 거의 다 건넜을 때 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셨고, 여호수아는 그 명령대로 열 두 지파에서 각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서 있는 곳에 가서 돌 한 개씩, 총 열두 개를 어깨에 메고 나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아니지만 제사장들이 서 있던 그 자리에도 돌 열두 개를 세우게 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요단강에서 올라올 때 그들의 발바닥이 땅에 닫자마자 요단강의 물이 다시 흘러서 넘쳤습니다. 길갈에 도착했을 때 요단강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거기에 세우고 여호수아는 돌들을 세운 의미를 말해주었습니다. 그 의미는 여호수아가 임의로 부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언약궤 앞에서’,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라는 말씀을 반복하시면서 언약궤를 강조하셨습니다. 23절에서 여호수아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라는 말로 언약궤를 하나님의 임재, 능력으로 해석했고, 백성들이 그 돌들을 보면서 그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게 하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23절 하반절에서 여호수아는 열두 돌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요단강 건넌 것을 홍해 건넌 것과 연결시킵니다. 우리는 앞에서 요단강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홍해를 건넌 것을 재현하는 것과 홍해를 건넌 세대를 넘어서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살폈었는데 여호수아가 그 점을 짚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길갈에 세워진 열두 돌을 보면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게 하신 그 하나님이 요단강도 건너게 하신 분임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지나간 과거의 사건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기억시켜야 합니까?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사건으로 자신을 나타내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공동체적인 연대 속에서 서로가 바른 신앙의 영향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열두 돌의 의미를 그냥 후손들에게 가르치라고 하시지 않고 ‘후일에 너희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이라는 말로 조건을 다셨습니다. 그것은 자녀들이 묻기 전에는 일절 가르쳐주지 말고 질문하면 의미를 설명해주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부모들이 언제든지 자녀들의 질문에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준비는 그저 부모가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말로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설명하는 부모 자신이 그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실제로 삶 속에서 그 하나님이 부모 자신에서 어떤 분으로 인정되고 계신지를 나타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그저 민족의 큰 위기 때 잠깐 등장하는 신, 사고를 막아주는 신 정도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갈의 열두 돌에 대한 자녀들의 질문에 대비한다는 것은 자녀가 부모의 설명을 들을 때 거기서 드러나는 하나님과 부모의 평소의 삶이 연관되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희 자손들이 묻거든”에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것을 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한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이 땅의 모든 백성들, 이방인들에게는 그 열두 돌들이 그저 놀라운 사건들을 일으키신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기념물이지만 백성인 너희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후손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도록 내가 본이 되고 있는 지를 돌아보게 하는 표식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유산을 다음세대에게 전달하려면 그 자신들이 그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 의미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부모세대는 하나님이 주신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달하기 위해 스스로 신뢰할 만한 본이 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 세대에게는 전해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할 책임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열두 돌이라는 기념물은 하나님 앞에서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신앙적으로 연대되도록 묶어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스라엘도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같은 대표 한 사람에게 돌 하나를 들고 가서 길갈에 세우라고 하시지 않고, 열두 지파의 각 대표들이 돌을 들고 가게 하셨습니다. 열 두 지파는 계속 분열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세 지파가 요단강 동편을 먼저 얻은 것도 그런 분열의 요인입니다. 인간은 하나가 되는 것보다, 힘을 가지고 이익을 취하려다가 편을 가르고 분열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민족이 연대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한 분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지금까지 왔음을 기억하는 것, 하나님 앞에 같은 죄인이지만 동일하게 베푸신 은혜로 살아온 자들임을 기억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의 은혜를 베푸신 후 모든 지파가 그것을 기념하는 일에 함께 참여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요단강에서 가져온 돌들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돌 자체는 내용을 전혀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 돌들은 그저 연관된 역사를 기억하게 하고, 그 역사의 주도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그것을 경험한 자신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하고, 그런 신앙이 자녀들에게 대물림 되어야 함을 지시하고, 그런 신앙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계속 연합해야 할 것을 자극하는 지시물일 뿐입니다. 실제 내용은 사람의 기억 속에, 마음 속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 있어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들을 그렇게 우리의 삶과 말을 통해 기억하고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자체가 메시지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전달해야 할 내용을 담은 대체물을 만들려고 합니다. 자기 밖에다가 형상을 만들어 놓고, 앞에서 언급한 책임들을 떠넘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자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신에게 하나님을 드러내고 후손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는데, 모순된 삶 때문에 설득력을 잃으니 형상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그것에게 책임을 넘기는 것입니다. 나의 인격과 삶의 실재와는 상관없는 별도의 우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면 우리에게는 책임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서로 편하게 종교성을 전달하는 장치입니다. 그래서 광야세대는 홍해를 건넌 후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십니다. 의미 없는 돌들을 세우셔서 자녀들로 하여금 의미를 묻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부모 자신이 입으로 대답할 때 설득력 있게 전달될 책임으로 부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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