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할례, 수치와 은혜를 기억함 (수 5:1-12)

따뜻한 진리 2016. 1. 10. 20:27

여호수아 5:1-12                                              김영제 목사(하늘기쁨교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가져온 열두 개의 돌을 그곳에 세웠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례는 남성의 성기 포피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할례는 당시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풍습은 아닙니다. 주변 다른 민족들도 할례를 행했지만 그들의 경우는 성인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행했고,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난지 팔일 만에 행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가 요구된 것은 아브라함 때입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86세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자 하나님께서 13년간 침묵하십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자 하나님께서 처음 약속하셨던 것을 다시 확인시키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 할례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이스마엘을 포함에서 종들에게 까지 할례를 시행했습니다. 할례는 사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 실패한 믿음을 기억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것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도 할례를 지켰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은 다 할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 즉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도착한 세대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5절을 보면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그리고 7절에서도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라고 말하면서 할례 받지 못한 이유가 광야 생활동안 계속된 이동 때문인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6절을 보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순종 때문에 약속된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40년간 방황하느라 할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할례는 인간적인 수단들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실 것을 신뢰하는 표시, 언약이 유효하다는 증표인데 불순종한 세대들이 다 죽을 때까지 그 언약 관계가 중단되었던 것입니다.

 

    8절을 보면 할례를 행하고 각 처소에서 낫기를 기다렸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매우 예리하고 잘 소독된 매스로 살을 도려내고 봉합을 해도 2-3일 동안은 정상적으로 활동하는데 제약이 있습니다. 그런데 돌로 된 칼로 살을 도려냈고, 봉합도 진통제도 없었으니 훨씬 고통스럽고 불편하게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남자들이 며칠 동안 자기 장막에 들어가서 쉬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바로 무방비 상태입니다. 겁에 질린 여리고가 가만히 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이판사판이니 선제공격을 하자고 결정했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본문에서 낫기를 기다렸다는 것은 그냥 아픈 상처가 낫기를 기다린 것인 아니라 혹시라도 일어날 위험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계속 일어나는 불안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무게로 눌러놓고, 다 맡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릴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9절을 보면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애굽의 수치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수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치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수치입니까? 애굽의 어떤 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에게 수치가 될 만한 것인지 근거가 될 만한 내용으로 출애굽기 3212절을 보면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들고 내려와보니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축제를 벌이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진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그 뜻을 거두시기를 간청하면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진멸하시면 애굽인들이 이스라엘의 신은 자기 백성을 지킬 능력도 없으면서 데리고 나갔다고 조롱할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애굽의 수치는 하나님께 수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본문 9절에는 그 수치가 너희에게서떠나가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애굽의 수치는 여호와 하나님이 당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잘못을 하셔서 수치를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하는 백성들의 죄를 처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애굽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치가 됩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의 신분으로 살아서 비극이었지만 그것은 외적인 수치였습니다. 그런 육신적인 노예시절보다 더 근본적인 수치의 이유는 그들의 내면이 죄의 노예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을 통해 자신들을 종으로 부렸던, 눈에 보이는 주인인 애굽에서는 자유로워졌지만 보이지 않는 자신들의 주인인 사단을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것이 진정한 수치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고, 그런 백성이 하나님께도 수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을 할례 받지 못한 자라고 수치스럽게 여겼지만 정작 할례 받은 자신들이 수치스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망할 것 같던 이스라엘 중에서 새로운 세대를 남겨두셨고,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발을 딛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고, 그들도 수치를 벗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할례가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치를 벗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9절에서 수치를 떠나가게하셨다는 것은 수치를 잊어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수치를 벗는 것, 떠나가게 하는 것이 잊어버리는 것이라면 과거를 기억하게 만드는 어떤 흔적도 남기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할례로 흔적남기기를 명령하셨고, 할례는 단순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시일 뿐 아니라 불순종하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으로 인치셨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아 불신을 드러냈을 때 하나님이 약속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할례를 요구하셨고, 광야에서 다 죽은 불순종한 부모들의 자녀 세대에게 약속을 성취하시려고 할례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할례는 먼저, 이스라엘이 믿음이 없었던 수치스런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방법이었고, 다음으로 무방비 상태를 자초하여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게 해서 믿음 없었던 과거의 수치를 극복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스라엘 남자들의 몸에 표징으로, 흔적으로 남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수치스런 과거를 잊으려고 합니다. 얼마 전 우리 정부와 일본은 위안부문제 협상을 갑작스럽게 합의했습니다. 우리는 100억원을 받고, 일본은 소녀상을 철거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 정부는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주요목적이 긍정적인 역사관을 후대에 심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비관적 민족의식을 갖도록 일본이 역사를 왜곡시켰기 때문에 바로잡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그것을 빌미로 집권자들이 자신들의 역사적 잘못을 미화함으로써 수치를 벗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간 본성이 그렇습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려, 잊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끄러운 과거를 기억시키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온전한 믿음을 자극하는 요소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믿음 없었던 수치스런 과거를 생각나게 하신 후에 다시 믿음을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나눠주셨습니다.

 

    그래서 흥미롭게도 본문에서는 할례를 마친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켰을 때에 만나가 그쳤고, 가나안 땅에서 나온 음식을 먹었습니다. 만나는 그런 수치스런 상태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인도하신 은혜를 상징하고, 가나안의 소출은 새로운 은혜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수치스런 과거를 기억할 때 겸손할 수 있고, 그런 나를 인도해 오신 하나님과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통해 죄를 발견하는 자가 회개를 끊임없이 할 수 있고, 새로운 은혜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