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5:13-6:2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할례와 유월절을 지킨 후 이스라엘은 여리고를 향해 전진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앞에 누군가가 나타나 길을 막습니다. 13절에서 여호수아는 그들의 정체를 이런 말로 묻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상대방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그는 이스라엘 편도 아니고 적들 편도 아니고 여호와께 속한 대리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낸 군대 대장이라면 이스라엘 편이어야 하는데, 그는 여호수아가 질문한 이쪽 편 저쪽 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여리고성을 공격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낸 사자가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것은 여호수아를 당황하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만의 편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나의 편이라고 우리가 착각할 때 우리는 교만해지고 하나님이 요구하신 명령들에 소홀해집니다.
아이들의 세계에도, 나라끼리도 편 가르기가 있습니다. 친구가 잘못했어도 의리를 위해, 나중에 도움 받을 것을 위해 편들기를 합니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도 항상 내 편이 되셔서 도움을 주시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군대대장을 통해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이 되셔서 우리의 마음을 얻으시려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신 것이고, 또 이스라엘을 통해 다른 이방들도 끌어당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지 않으면 이방만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망합니다. 그러니 여호수아는 이제 여리고성을 향해 나아가면서 이 전쟁이 그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고, 이스라엘은 거기 속해서 순종하는 것일 뿐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군대대장 앞에 엎드렸고,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군대대장은 신을 벗으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들었던 명령으로써 종의 자세를 취하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했고, 신을 벗으라는 명령은 그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여리고성을 얻게 되는지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8절을 보면 일곱 제사장들이 일곱 개의 양각 나팔을 잡고 가고 그 뒤에는 언약궤가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나팔 부는 일곱 제사장들이 선두가 아닙니다. 9절을 보면 무장한 군인들이 나팔 부는 제사장 앞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후군은 언약궤의 뒤를 따릅니다. 그러니까 언약궤가 대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대열로 나팔을 불며 여리고성을 하루 한 바퀴씩 6일을 돌았는데, 백성들은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됐습니다. 그런데 일곱 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의 나팔 신호에 일제히 백성들이 외쳤습니다.
여리고성이 함락되었고, 정탐꾼들이 약속한대로 라합과 함께 있던 가족들은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여리고성에 있던 다른 모든 생명은 전멸시켜야 했고, 금은동철은 개인이 갖지 못하고 여호와의 집 곳간에 넣어둬야 했습니다. 여리고성은 무너졌고, 마지막 절에 여호수아는 무너진 여리고를 절대 재건하지 말라고 엄포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성 전투에서 얻은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주신다고 했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일반적인 전리품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얻은 것은 그 땅과 라합의 가족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계속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땅과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산 증인들인 라합의 가족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군대 대장을 만난 사건이나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얻게 된 일이나 그것은 전쟁과 관련되기보다는 예배에 가까운 장면들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군대 대장에게 엎드렸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따라 여리고성을 돌았는데, 이 때 양각나팔을 불었습니다. 양각나팔은 하나님의 오심, 임재를 나타내며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배로의 초청을 하는 신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도는 행위는 전쟁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언약궤를 따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에 가까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승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은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기는 것, 싸움이나 전쟁에서 이겨서 많은 것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의 승리는 지속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잃게 되고, 기껏 수고해서, 이겨서 얻은 것을 어리석게 낭비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끼리의 경쟁이 그렇고 국가간의 전쟁이 그렇습니다. 영원한 승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승리는 영원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승리자이신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계속,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드는 상태, 하나님만 믿고 살도록 만드는 길로 가는 것이 진정 승리입니다.
내가 승리의 주체가 되고, 내가 승리의 결과를 누리면 그런 승리는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승리의 주체가 되시고, 하나님이 승리의 결과를 획득하시는 분이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여리고와 싸워서 이기게 하지 않으셨고, 여리고의 승전물을 개인이 소유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리신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실 권리가 있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노예 취급하시면서 그들의 소유를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소유할 것들도 충분히 공급하십니다. 단 가나안에서의 첫 전투인 여리고성 사건을 통해서 만큼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승리의 주체가 누군지, 그리고 승전물의 주인이 누군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은혜로운 선물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는 주인이심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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