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2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가나안 땅 분배가 끝나고, 도피성을 포함한 레위지파의 성읍이 지정된 후 이제 여호수아는 요단강 동쪽 지파들을 보냅니다. 요단강 동쪽 지파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입니다. 그들은 모세 때 요단강 동쪽 땅을 요구해서 얻었지만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이 약속된 가나안 땅을 얻기까지 전쟁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대로 책임을 다했습니다. 여호수아도 그런 그들을 칭찬하면서 자신들의 소유지인 요단강 동편으로 돌아가라고 허락합니다. 그래서 5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라고 권면하고 축복했습니다.
동쪽 지파들이 요단강에 이르자 그들은 강을 건너기 전 강가에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10절이 말하는 대로 그것은 보기에 규모가 큰 제단이었습니다. 서쪽 가나안 지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 제단을 세운 동쪽 지파들과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이 실로에 모인 이유는 그곳이 성막이 세워져 있는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곧바로 동쪽 지파들과 싸우러 가지 않고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각 지파의 지도자들을 보내 대화를 시도합니다.
신명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지정된 한 곳에만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서쪽 지파대표들은 다른 제단을 쌓는 것이 여호와 앞에 죄악인데 왜 너희들은 이런 일을 행했느냐고 동쪽 지파에게 따졌습니다. 그러자 동쪽 지파들은 그 제단이 제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증거물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 서쪽 지파의 후손들이 우리 후손들과 한 공동체임을 잊어버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동쪽의 우리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깃을 받지 못하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소외될 것이 걱정된다는 것입니다(25절).
그러면서 동쪽지파들은 절대로 이 제단을 제사 용도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면 하나님께서 큰 벌을 내려주시길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비느하스와 지도자들은 그 설명을 듣고 좋게 여겨서 기뻐하며 돌아갔고 그것을 전해들은 이스라엘은 동일하게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어떻습니까? 큰 싸움이 일어날 뻔 했는데, 지혜롭게 대처해서 대화를 통해 은혜롭게 끝난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의 교훈으로써 상대방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자고 말합니다. 또 동쪽 지파들이 제단을 쌓아 신앙적 정체성을 후손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약속된 것을 백성들에게 주셨지만, 백성들은 끝까지 순종을 통해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았다는 것에 덧붙여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음에도, 은혜를 누렸음에도 그 새로운 시작부터 이스라엘 공동체가 죄성으로 와해될 조짐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단강 동쪽의 자기 땅으로 돌아가던 지파들이 쌓은 제단은 정말 기억을 위한 증거물로써 의도된 것이었을까요? 성경에는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으신 증거물을 사람이 쌓은 일들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노아(창8), 아브라함(창12), 이삭(창26), 야곱(창28), 모세(출17)가 제단을 쌓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진 후에는 오직 언약궤가 함께 있었던 성막에만 제단이 있었고, 가나안 땅을 얻은 후에는 그 성막이 머문 실로가 중심 성소가 됩니다. 그러다가 사울 때에 블레셋에 의해 실로가 공격받고 언약궤를 빼앗기면서 중심 성소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무엘이 재단을 쌓고(삼상7), 다윗도 재단을 쌓는(삼하24)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즉 율법이 주어진 후 예수님이 오실 때 까지는 다른 제단을 쌓는 것은 금지된 일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신명기 12장에서 하나님이 금지하신대로, 또 그것을 근거로 이스라엘이 동쪽 지파에게 지적한 대로 다른 제단은 잘못이었습니다. 동쪽지파들이 쌓은 것은 그냥 기념물이 아니라 분명 재단의 형태인데다가 규모상으로 더 커서 실로에 있던 제단을 대체하려는 의도로 여겨질 만 했던 것입니다. 동쪽지파 역시 그것이 제단임을 스스로 인정합니다(23, 26절). 자신들이 한 일이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일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어떤 핑계를 댑니까? 첫째, 제단을 쌓아도 제사만 안 드리면 된다는 논리를 폅니다(26, 28, 29절). 그들은 율법이 언급하는 형식, 외형적인 규범들을 어기더라도 추구하는 의미만 좋으면 된다는 매우 진보된 생각을 가진 것처럼 말합니다.
둘째, 그들은 자기들이 제단을 쌓을 수밖에 없는 원인이 서쪽지파에 있다고 말합니다. 25절과 27절에서 ‘너희 자손들이 잊어버리고 딴 소리 할까봐서 그런 것이다.’라고 동쪽 지파들이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식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부모인 자신과 자녀의 신앙에 달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왜 동쪽지파에게 책임이 있는 것으로 말했을까요?
셋째, 그들은 제단을 쌓은 것이 자신들의 후손을 위한 일이라고 말합니다(24, 25, 27절).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제단에 관한 율법을 어겼고,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동쪽 땅을 요구해서 선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식들의 신앙을 걱정한 것은 모순입니다. 그들의 본심은 여호와 하나님이 언젠가 또 주실지 모르는 분깃에서 자식 세대가 소외되지 않기를 바란 것이었지 자식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늘 경외하길 바랐기 때문에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신앙적인 척하는 치장에 불과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동쪽 지파는 제단을 쌓고 그런 변명들을 한 이유는 이런 것으로 판단됩니다. 동쪽 지파들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동쪽지파 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쪽 지파는 이스라엘 내에서 다른 지파들보다 재력이 컸고, 정치적 권력도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설명한 대로 그들은 동쪽에서 먼저 땅을 선점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가나안 땅을 주실지 앞날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보니 정말 하나님께서 그 좋은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제 동쪽지파들이 자기들 땅으로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자신들이 선점한 동쪽 땅보다 서쪽지파들이 받은 땅이 더 넓고, 그 수도 많은데다가 자신들이 얄밉게 행동한 것 때문에 서쪽 지파들이 자신들을 소외시킬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쪽에다가 다른 제단을 만들고 계속 서쪽 지파의 후손들에게 장래에 대한 책임을 지운 것입니다. 서쪽 지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오직 현실적인 복에서 소외될 것이 두려웠을 뿐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이 요단강 동편에 거주하려고 했던 것부터 잘못입니다. 그들이 정말 자자손손 하나님을 경외하길 원했다면, 진정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기업과 복을 얻고자 했다면 그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관심을 가졌어야 합니다. 다른 것을 포기하고 믿음을 가지고 다른 지파들처럼 요단강을 건너 약속하신 땅을 받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 세운 열두 돌, 할례의 흔적, 본문 5절의 여호수아가 당부한 마지막 권면의 내용들을 통해 그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서야 했습니다. 또 서쪽 지파가 제단에 관해 그들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었고, 19절에 나오는 대로 가나안 동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하나님께서 주신 서편으로 건너와서 같이 살자고 제안까지 했지만 그들은 잘못을 고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속내만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회삼아 자신들의 불신과 욕심을 내려놓아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불신앙을 덮고자 서쪽 지파가 자신들을 잊을 것을 문제시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일, 경외하는 태도, 이미 주신 증거와 명령에 성실하게 반응하는 것에는 게으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것에만 관심을 갖기 쉽습니다. 그것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쪽지파들처럼 우리 자신의 불신앙이 누적되어 온 것은 생각하지 않고, 어떤 유익을 누릴 때 내가 소외되지 않기를 염려할 뿐입니다. 또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가리기 위해 동쪽지파가 서쪽 지파 후손들을 가지고 시비 걸었던 것처럼 우리도 남 탓만 하게 됩니다. 시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리, 하나님께 받을 것에 집착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에 집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길 원합니다. 여호수아가 권면한대로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그를 섬기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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